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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시 보기(re-spect) : 왜인의 기원을 찾아서

레이지 데이지 2011. 12. 26. 15:45

일본 다시 보기(re-spect) : 왜인의 기원을 찾아서 1, 2, 3

이 글은 원래 KBS 의 장기 기획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면서 1996년 최초로 작업한 다큐멘터리 기획물이다.

현재 가공할 쓰나미와 원전 방사능 누출로 참담한 상황에 처한 일본과 일본인들을 

다시 보고 향후 한.일 관계를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 !!  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자 여기 올려본다.  

 

  일본 다시 보기(re-spect) : 왜인의 기원을 찾아서 ...1

 

이 가공할 쓰나미가 일본을 할퀴고 간 흔적 만큼이나 메이지 유신 이후 만들어진 일본인의 근대성과 일본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도 일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형성될 수 있을까..  

We Shall Over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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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의 기원을 찾아서  

 

14세기말 격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고려와 몽골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하고, 새롭게 조선과 명이 일어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왜구(倭寇). 이 왜구가 일본의 해적이었느냐 아니면 오늘날 중국 상하이 아래 명주(會稽:회계) 앞바다에 위치한 주산 열도를 근거지로 하는 해민이었느냐 하는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한가지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왜(倭)’를 과연 일본과 동일시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우리가 이 문제를 먼저 집고 넘어가야 하는 까닭은 왜구에 대한 모든 오해가 바로 왜를 일본과 동일시하는데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에서 ‘왜=일본’이라는 등식은 너무도 당연시되어 있다. 하지만 ‘왜’라는 명칭이 사용된 중국의 고대 문헌들을 살펴보면, 왜를 무조건 일본이라고 단정하기 힘든 요소가 있다. 

 

 

 

[산해경]에 나타난 왜인

 

먼저 '왜'라는 민족이 처음으로 나타난 [산해경](山海經)을 보면, "개(蓋)나라는 연(燕)나라의 남쪽, 왜의 북쪽에 있고, 왜는 연나라에 속해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연나라는 당시 전국시대 강국의 하나로, 현재 북경을 중심으로 발해만 북안에서 요동반도 근처까지의 영토를 점유하고 있었다.

 

연나라는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한(漢)민족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밝혀진 고고학 연구 성과에 따르면, 연나라는 하남성 등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국인들과는 상당히 달라, 오히려 맥(貊)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한 시대 양웅(揚雄)이 저술한 [방언]에도 연나라 언어는 중국과 달라, 소위 요녕 문화로 알려진 청동기 문화의 주체인 예(濊)나 맥의 언어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연나라는 비단 언어뿐만 아니라 물질·문명상으로도 중국보다는 오히려 예나 맥과 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쓰여진 연대는 대략 BC 3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당시 연나라에 가장 근접한 나라로 맥이 있었다. 맥은 하북성 북부, 동몽골 남부에서 현재 중국의 동북 지구의 서남부 연안에 걸쳐 있던 민족이다. 맥의 동남방으로는 요동반도의 북쪽에서 한반도 서북부에 걸쳐 고조선이 있었다.

 

그리고 그 북방에는 예족이 있었는데, 예족은 맥족과 깊은 관계에 있어, 한 때 ‘예맥’으로 통칭되어 불렸던 민족이다. 맥족은 나중에 자신들의 근거지를 만주 동부로 옮겨 고구려가 되는데, 여러 면에서 볼 때 예는 퉁구스계, 그리고 맥은 몽골의 피가 섞인 퉁구스계 민족으로 추정된다.

 

동북아시아에서 맥에 이어 중국측에 알려진 민족은 우리나라의 시조로 알려진 고조선이다. 연나라 사람들이 요동반도의 북쪽, 즉 만주 지역의 동남부에 상당한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었던 까닭에 고조선도 그들에게 알려져 있던 것이다.

 

그런데 [산해경]에서 말하는 개(蓋)나라의 위치가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요동반도 등 고조선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게 본다면 만일 왜가 개나라에 접해 있고, 연나라에 속해 있다면, 당연히 왜도 만주 동남부에서 한반도 서북부에 위치한 나라로서 중국에 알려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산해경]을 제외한 진(秦)나라 이전 중국 문헌 어디에도 왜는 맥이나 조선과는 함께 등장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에는 만주나 조선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던 부여(맥 혹은 예의 중간)도 알려지고, 그 후에는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三韓)조차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아직 이들 민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전국 시대에, 그것도 머나먼 일본 열도에 살던 왜가 연나라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면, 우선 삼한을 지나 조선 내지는 맥을 통해 하북성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러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중국에는 삼한조차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던 시기다.

 

따라서 적어도 에 나타난 왜를 일본 열도에 살던 왜와 동일시 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한서지리지]와 [위지동이전]에 나타난 왜인

 

[산해경]에 이어 전한 시대에 쓰여진 [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의 ‘연지조’를 보면, 여기서도 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낙랑의 바다 가운데 왜인이 100여 국으로 나뉘어 있어, 세시를 따라 일정한 시기에 공물을 바치러 온다"고 기술되어 있다.

 

BC 2세기말~1세기 무렵, 당시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는 현재 북한의 수도인 평양 근처에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창구 역할을 담당하는 방편으로 낙랑군이라는 식민지를 개척했다. 그런데 바로 그 낙랑의 바다 가운데 왜인이 있어 공물을 바치러 온다는 것이다.

 

당시 한반도 남부의 한인(韓人)들은 아직 낙랑과 직접적인 교역을 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한인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한 일본 열도의 주민이 육로를 통해 낙랑에 갔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순서로 보면 일본인보다 먼저 낙랑과 교역했어야 할 한인(韓人)이 교류한 적이 없는 시대에, 왜인이 낙랑의 바다를 통해 그곳에 왔었다는 명백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다. 대체 이같은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한서지리지]가 쓰여질 당시, 이미 연나라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나라 이전에 어떤 세력을 가졌거나 경제 관계를 갖고 있던 육상 또는 해상에 걸친 연나라의 세력권 내지 경제권을 에서 ‘연지’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추정해볼 수 있다.

 

실제로 중국 사서는 기본적으로 중화 사상에 입각해 기술되는 까닭에, 예로부터 자국과 무역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조공을 바치러 온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진귀한 재물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온 외국인은 중국의 식민지 사람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교역을 위해 바다를 통해 연나라로 들어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연에 속했다"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그렇게 가정할 경우 에 실린 왜의 기록 역시, 낙랑군에 왔던 것과 동일하게 2세기 정도 앞선 전국 시대에 동북아시아에서 커다란 세력및 경제권을 가지고 있던 연나라에 왜가 해상을 통해 방문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조금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이후 후한 시대(1~2세기)로 접어들면, 일본 열도의 왜인이나 한반도 남부의 한인들에 대한 기사가 의 동이전이나 위지동이전에 분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북큐슈 지역의 마쓰라국(努國)이나 이토(伊都)국의 왕이 사신을 후한의 조정에 파견해 金印을 하사받아 한나라의 外臣이 된 사건, 3세기 전반기인 위나라 시대, 북큐슈의 히미꼬 女王國인 야마타이국(邪馬臺國) 사자가 위나라의 서울인 낙양을 방문해 여왕이 ‘親魏倭王’에 책봉되어 위나라 사자까지 일본에 갔던 일, 또한 한반도 남부나 북큐슈 연해지역 등에 대한 상세한 기록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남부의 한인이 중국과 교통하기 5~6백년 전, 이미 왜인이 중국 본토에 살며 당시 발해만을 장악하고 있던 연나라와 통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 그리고 한인(韓人)과는 달리 상당히 일찍부터 해상 무역에 종사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왜인과 일본의 왜인과는 어떤 관계에 있었던 것일까?

 

후한 시대에서 위진 무렵 시기의 왜인이 어디에 살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다행히 위지동이전 왜인조에는 중국으로부터 왜인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는 노정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경로를 통해 어느 정도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위지동이전 왜인조에 따르면, 위나라 수도인 낙양에서 지금의 서울 근처에 있던 대방군을 경유해 서안으로 내려가 대한 해협에 이르면, 부산에서 가까운 김해만에 위치한 구야 한국에 다다르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그곳에는 한인과 왜인이 접촉하고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위지동이전 왜인조에 의하면, 그 무렵 왜인의 분포는 한반도 남단 구야 한국에서 시작해 쓰시마(對馬島)와 이키(壹岐)를 거쳐 북큐슈에 들어와 이토국 등을 경유해 히미꼬 여왕국에 이른다고 기술되어 있다.

 

다만 여기서 야마타이국의 위치가 북큐슈인지 기나이(畿內)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일본내에서 많은 논쟁이 일고 있다. 쿄토 대학을 중심으로 한 관서학파는 기나이설을 주장하고, 동경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관동학파는 북큐슈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흥미로운 사실은 양자 모두 위나라 시대 즉, 3세기 중엽에는 일본 열도 뿐만 아니라 한반도 남단에도 왜인이 일부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이같은 사실은 김해만을 중심으로 낙동강 하류를 거쳐 북큐슈의 야요이 문화를 특징지우는 옹관묘(甕棺墓) 매장 방식이 발견되고 있는 것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 일본의 왜인이 한반도 남단에 진출했었다는 일본측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남부지역 특히나 한반도 서안에서 대한해협 방향으로 넓게 분포되어 있는, 커다란 돌로 머리를 덮은 지석묘 역시, 놀랍게도 2차대전이 끝난 후 일본 북큐슈에 있는 야마구찌현 일부에 걸쳐 있는 야요이(彌生) 시대의 유적에서 대량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왜인이 한반도에 진출하고 있었던 것과 동일하게 한인들도 역시 북큐슈나 혼슈 서남부 등에 상당히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한가지 분명해지는 것은 한인과 왜인은 각각 한반도 남부와 일본 서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양국 모두 상대방 영토에 진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 사서에 나타난 왜인의 고기잡이 어법

 

그러면 이번엔 눈을 잠깐 돌려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왜인의 문화적 특성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의 선비전을 보면, 왜인의 고기잡이 방법에 대해 언급된 부분을 볼 수 있다. 선비족은 후한 시대 동몽골에서 발흥한 몽골계 민족으로, 점차 중국 북방을 위협하고 동쪽으로는 만주 지역까지 진출했던 민족이다.

 

그런데 당시 그들이 정복한 만주 지역에는 오후진(烏候秦: 遼河支流의 老哈河)이라는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호수에는 물고기가 많이 있었는데, 선비족은 유목민인 까닭에 고기 잡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선비족의 수령인 단석괴(檀石槐)는 왜인이 고기잡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얘기를 듣고 왜인의 나라를 습격해, 포로로 잡은 왜인을 그 호수로 강제 이주시켜 고기를 잡게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사건은 광화(光和) 원년(178년)에 발생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선비족의 백성이 점차 급증하여 식량이 부족해 농경이나 목축, 수렵만으로는 도저히 백성의 식량을 채울 수 없었다. 그래서 선비족의 수령 단석괴는 식량을 구할 방법을 도모하고자 자국의 영토를 시찰하던 중, 오후진수(烏候秦水)라는 호수에 이르렀다. 그 호수는 종횡으로 수백리나 펼쳐져 있었는데, 물은 흐르지 않아 정체해 있었고 호수엔 엄청난 양의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유목민인 그들은 물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왜인이 물고기 잡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에서 동쪽 방면에 있는 왜인이 사는 나라를 토벌했다. 그리고 천여 가호를 포로로 잡아 그 호수 근처로 강제 이주시켜 고기를 잡게함으로써 자국 백성의 양식을 마련하였다.” ( 선비전, 광화(光和) 원년)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문헌에서 왜인(倭人)의 표기가 우인(汙人), 또는 한인(汗人)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여기서 한인(汗人)은 우인(汙人)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문제는 여기에 나타난 우인(汙人)을 과연 왜인(倭人)과 동일시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보다 먼저 쓰여졌으며, 기자가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선비전에도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다만 에는 고기를 잡는 것이 뛰어난 것은 한인(汗人)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게다가 의 주석에는 “한(汗)은 우(汙)의 오기이고, 우(汙)는 왜(倭)와 같은 발음이므로 한인(汗人)은 왜인(倭人)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음운학상으로 볼 때, 倭(wa)와 汙(wu)는 모두 같은 w발음이다. 그리고 모음 a와 u는 유사 발음인 까닭에 왜(wa)를 우(wu)로 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같은 주장은 얼마전 소련의 한 학자가 시베리아 연해주 남부나 흑룡강 하류 지역에서 발견한 일본 야요이 문화의 것과 흡사한 석기나 토기, 청동기가 출토된 농경군락지에 의해 점차 그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이처럼 왜인, 구체적으로 북큐슈 왜인이 고기를 잡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은 다른 여러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위지동이전 왜인조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왜인은 바다에 잠수해 고기를 잡는 기술이 뛰어나다. 그래서 남자는 어른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얼굴과 온 몸에 문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남방의 회계(會稽:명주)에 옛날 삼황오제(三皇五帝) 때 우임금의 자손이라 불리는 사람이 그곳의 왕이 되어, 그곳의 풍습을 따라 문신을 하여, 이무기(蛟龍)의 해를 피했다고 한다. 왜인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문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회계는 놀랍게도 다름아닌 명주다. 그리고 명주는 우리가 앞서 계속해서 다뤄왔던 재당신라인과 재송고려인, 그리고 여말 왜구로 불린 주산 해민들의 근거지인 주산열도가 위치한 지역이다.

 

물론 우리는 이 기록에 대해 중국 남방인 주산열도의 문신 풍습을 가지고 왜인의 문신을 해석한 것은 단순히 중국인들의 중화 사상에 근거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주산열도에 대한 중국인들 자신의 지식으로 왜인의 풍습을 추측한 것일 뿐, 아무런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신을 하고 물속에 들어가 이무기나 인어(鱗) 등의 해를 피했다는 것은 결코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다. 중국의 오(吳)나라나 월(越)나라에 그 실례가 있고, 운남(雲南)지역의 애우(哀牛)라는 종족에게도 그 풍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년 전 서해 식인 상어 출몰에서 보듯이,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채취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적은 커다란 육식성 물고기 예컨대, 상어나 기타 그에 준하는 물고기, 그리고 그들의 상상하는 바 이무기(蛟龍)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몸에 용의 문신을 함으로써 물속에서 육식성 물고기를 만났을 때,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인식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이처럼 액땜 신앙 때문에 재당신라인의 근거지였던 명주(회계) 앞바다의 주산 해민 들이 문신을 했다는 사실과, 왜인이 바다에 잠수해 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채취하고, 문신을 함으로써 큰 물고기나 물 속의 위협적인 존재의 해를 피했다는 사실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적어도 만일 왜인들에게 실제로 그러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용의 문신이 아니었을까 하고 우리는 추측할 수는 있다. 사실 이같은 문신 풍습은 오늘날에조차 동남아시아나 인도네시아계 민족들 사이에 남아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고기를 잡을 때는 낚시나 화살, 그물 등을 이용해 잡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왜인은 모두 잠수를 해서 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채취하는 방식을 취한다. 물론 제주도나 서남해안 지방의 해녀와 일본 큐슈 지역의 해녀들에게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한국과 일본에서는 잠수를 통한 고기잡이가 널리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잠수 어법은 세계적으로는 매우 희귀한 어법인 것이다. 따라서 선비족에게 끌려가 고기를 잡던 왜인이 일본 열도에서 끌려간 왜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이제 무관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진 셈이다.

 

 일본의 가마우찌 고기잡이 축제.

 

왜인의 가마우지를 이용한 고기잡이

 

고기잡이와 관련해 중국의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왜인 특유의 방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가마우지라는 물새를 이용해 고기를 잡는 방법이다. 가마우지를 통한 고기잡이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수나라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다.

 

의 왜국조를 보면 “작은 금속 고리관에 끈을 묶어 가마우지 목에 걸어, 물속으로 들어가 고기를 잡게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물론 이것은 7세기경이므로 일본의 야요이 시대의 기록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7세기경에 일본에서는 가마우지를 통한 고기잡이가 실시되고 있었고, 중국인들도 이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송나라 이후의 문헌에는 가마우지를 통한 고기잡이가 중국에서도 행해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명나라 무렵에는 중국에 온 외국인의 기록에도, 양자강 유역에서 목격한 가마우지를 통한 고기잡이에 대해 흥미롭게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중국에서도 송대 이후에는 가마우지를 통한 고기잡이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중국의 가마우지 어법이 일본의 가마우지 어법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우리는 기록상으로 일본이 오래되었으므로, 일본의 가마우지 어법이 송나라 시대에 중국에 전해졌다고 추론할 수 있다.

 

기록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특성에 비추어 볼 때 그들에게 이전부터 가마우지 어법이 있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사서에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할텐데,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거꾸로 송나라 이전에는 가마우지 어법이 중국에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의 가마우지 어법은 중국의 가마우지 어법과 다르다. 일본은 가마우지의 금속 고리에 부착된 끈을 끌어당기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끈을 부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의 가마우지 어법이 일본과 달리 끈이 없다고 해서 양자가 무관하다고 하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중국의 양자강이나 동정호 등은 모두 흐름이 완만하고 커다란 강이나 호수인 까닭에 끈이 그다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하천이 매우 급류인 까닭에 끈을 잡고 있지 않으면, 가마우지가 떠내려가 버리고 만다.

 

또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중국에 가마우지 어법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 될 수 있다. 왜냐면 적어도 후한 시대에 중국에서 가마우지를 이용한 고기잡이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최근에 사천성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사천성은 양자강을 쭉 거슬러 올라간 곳에 위치해 있는데, 그 주변은 커다란 산지로 하천도 급류가 많은 지역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역에 후한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화상석(畵像石)이 많이 발견되었다. 화상석이란 돌 위에 그림을 새겨넣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사천성에서 출토된 화상석에는 물새가 한 마리씩 목에 끈을 매단 채, 물속에서 헤엄치는 그림이 발견되었다. 물론 물새의 끈을 붙잡고 있는 것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 화상석에 새겨진 물새의 모습은 가마우지라기보다는 오히려 갈매기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가마우지가 아닌 다른 물새로 고기를 잡게 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므로 아마도 가마우지였으리라 추측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에도 기록상으로는 가마우지가 아닌 ‘노자’(鸕鶿) 라는 이름을 가진 새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가마우지와 동일한 기능을 하는 물새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가지 분명해진 것은 적어도 가마우지 어법을 담은 그림이 새겨진 화상석이 만들어진 후한 시대에 이미 중국에서는 가마우지를 이용한 고기잡이가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후한 시대에 이미 가마우지 어법이 사용되고 있었다면, 중국의 사서에는 어떻게 그로부터 한참 지난 7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는 것일까?

 

혹시 수나라 시대에 강남 지역의 문화에 눈이 어두운 북조(北朝) 계열의 사람이 일본의 가마우지 어법을 매우 희귀한 일로 여겨 기록에 남긴 것일 뿐, 이미 강남지역에서는 훨씬 이전부터 가마우지 어법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런 강남 지방의 가마우지 어법이 그들의 수도 농경 문화와 함께 일본 서부 큐슈 지역에 전해진 것은 아닐까?

 

사실 가마우지를 이용한 고기잡이는 오늘날 중국의 양자강 유역에서 태국에 이르는 매우 넓고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사용되고 있다. 더불어 문신을 하고 잠수해 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채취하는 방법 역시, 인도네시아에 걸친 여러 민족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의 서남해안과 제주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 남부의 한인과 일본 서부의 왜인은 거의 공통된 문화권을 공유하고 상호간에 교역 혹은 인적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양국은 모두 동남아시아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이는 수도 농경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강남 지방에서 수도 농경 문화를 영유하던 사람들이 강남에서 동중국해 건너 한반도 남부나 일본 북큐슈로 들어와, 그들과 섞이면서 한반도에서는 한인이 되고, 일본에서는 왜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원전 2세기 무렵에 연나라와 교역한 왜인과 야요이 시대에 일본 열도에 살던 왜인이 동일한 사람들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일본보다 가까운 지역에 있던 한인들이 아직 연나라와 교류하지 않은 시기에, 이미 왜인 은 연나라에 진출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인이 한인이 사는 곳을 경유해 연나라로 갔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왜인의 경로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시도해야만 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야요이 시대에 한인은 이미 일본 서부 지역에 진출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외 다른 곳으로 진출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 왜인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반도 남부와 만주 남부, 연해주 남부 지역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왜인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일본인이 아니라, 일찍이 동중국해 연해, 혹은 동해 연해에까지 폭넓게 활동하고 있었던 해상 민족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왜인은 도대체 자신들의 근거지를 어디에 두고 있던 것일까?

 

중국 강남 지역의 왜인과 선박 구조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담한 추측을 가정해보기로 하자. 그것은 왜인이 원래 강남 회계(명주) 지역에서 수도 농경 문화를 유지하던 해상 세력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회계(명주)의 주산열도를 근거지로 중국과 교역하기 위해 배를 타고 연나라 근처까지 갔던 것이다.

 

다시 말해 왜인은 처음부터 일본 열도나 한반도 남부에 수도 농경 문화를 가지고 이주한 게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목적으로 해상에서 활동했고, 그런 가운데 중국과 한반도 남부, 일본 서부 지역과 접촉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처럼 무모하게 보이는 듯한 우리의 추측을 뒷받침해줄 만한 근거가 있다.

 

강남 지방인 양자강 유역의 오나라나 월나라, 또는 월나라 계열의 민족이 조선 기술이나, 해상 전투, 무역을 하는데 있어서 탁월했다는 사실은 멀리 춘추 시대부터 전한 시대에 이르는 중국의 문헌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춘추 시대에 양자강 하구에는 이미 오나라와 월나라 같은 강국이 등장한다.

 

이들은 원래 양자강 연안에 살고 있던 비한인 계열의 민족이다. 그들은 회수(淮水) 지역을 중개지로 해서 은·주 시대부터 중국 문화와 접촉했었다. 그리고 춘추 시대에 이르러 독자적인 문화를 발달시켜 훌륭한 나라를 건설해, 중국 열강의 하나가 되어 주변 민족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이들은 원래 수도경작민으로 그들의 살던 지역의 하천이나 호수를 이용해 관개 농업을 발달시키고, 조선 기술을 습득해 배를 타고 각지로 나아가 상업적 진출을 시도하였다. 또한 3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주산열도를 근거지로 수상 생활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 적벽대전을 이런 관점에서 감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상태는 오.월 시대로부터 진·한(秦·漢)이 자기 세력을 이 지역에 확대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 까닭에 한나라 시대엔 이 지방의 수군을 한나라 해군의 주력 부대로 삼기조차 하였다. 더불어 당시 높이 10여장이 넘는 대형 군함이 있었고, 그 사령관을 누선장군(樓船將軍)이라 불렀다는 사실이 이미 전한 시대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커다란 대형 범선을 타고 강남 지역 특히, 연해 지방의 어로 작업과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던 왜인들이 동중국해를 건너 발해만으로 들어와 화북의 연나라 근처까지 왔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러한 왜인들의 항해 경로에 대한 우리의 추측을 뒷받침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최근 오키나와에서 출토되었다. 그것은 야요이, 혹은 그보다 조금 이른 시대로 추정되는 일본 오키나와의 구스쿠다케(城獄) 패총에서 발견된 명도전이라는 화폐다. 명도전은 칼 모양을 한 청동으로 된 화폐를 말한다.

 

지금까지 명도전은 동아시아에서 연나라의 세력권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요동과 압록강 중류, 그리고 한반도 서북부(대동강, 청천강의 상류) 지역에서만 출토되었을 뿐, 연나라의 경제권 밖에 있던 한반도 남부나 일본에서는 한번도 출토된 적이 없던 화폐다.

 

명도전.

 

그런데 일본에서조차 가장 뒤늦게 야요이 문화가 전파된 것으로 알려진 오키나와에서 연나라의 교역권에서만 출토되던 명도전이 발견된 것이다. 대체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것을 연나라와 해상 교역하던 주산열도의 왜인이 중국 동부 연안을 따라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의 오키나와까지 돌아다니며 교역하고 있었다는 사실의 반증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것은 과연 당시에 강남 회계(명주) 지역의 주산열도에 살던 왜인들이 대거 이주할 만큼 커다란 대형 선박, 그것도 근해가 아닌 험한 바다의 거친 파도를 이겨낼 수 있는 내구성이 강한 배가 당시에 존재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강남 지역의 배는 준구조선이었다. 준구조선이란 배 밑쪽을 여러개의 커다란 나무를 잘라 파내 서로 연결해 묶고, 그 옆에 판자를 대어 파도를 방지한 배를 말한다. 그리고 갑판 위에는 지붕을 설치하고 배의 방향 조정은 노로 하는데, 선미에는 노를 가지고 배의 키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설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같은 사실을 추정해볼 때 우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것은 강남 회계(명주) 지방의 주산열도에 근거지를 둔 왜인이 일본으로 이주해갔으리라 추정되는 시기에, 이미 강남 지역에는 지붕을 갖추고 바다를 건너기에 적합한 준구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준구조선은 많은 노와, 배의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방향키가 부착되어 있으며, 선수와 선미가 우뚝하게 솟은 곤돌라형으로서 최소한 20~30명 정도는 충분히 승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인이 강남 지역 출신이라는 전승들

 

사실 왜인이 강남 회계(명주) 지역에 살았었다는 전승은 중국측 문헌 여러 곳에 남아있다. 그 문헌 가운데 후한시대의 (論衡)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가 앞서 살핀 위지동이전 왜인조에 언급된 주산열도가 위치한 회계(명주)에 살면서 그 지방의 사정에 밝은 왕충(王充:27~100)이라는 학자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 우리가 그처럼 찾아 헤매던 왜의 정체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데 결정적인 열쇠가 되는 구절이 보인다. 원래 양자강 유역에는 오나라와 월나라를 이어 초(楚)나라로 불리는 강력한 비한인 계열의 나라가 발흥했었다. 당시 초나라의 중심지는 지금의 호남성 장사(長沙) 근처로 양자강 중류 지역이다.

 

이후 초나라는 점차 세력을 확대해, 아래로는 양자강 하류 지역까지 내려가고 위로는 화북 지역까지 북상해 중국의 진(晋)나라와 패권을 다투게 된다. 그 결과 유명한 진·초(晋·楚)의 전쟁이 발생한다. 그리고 조금 지나 진(晋)의 뒤를 이어 한(漢)나라와 패권을 다투던 초나라는 마침내 패망하여 역사의 장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당시 초나라와 함께 근처에 있던 강국으로 월(越)나라가 있었다. 월나라는 나중에 크게 나뉘어 민월(閩越), 구월(甌越), 낙월(駱越) 등으로 불려지며 총칭해서 백월(百越)이라고도 불려졌다. 그리고 한나라 초에는 남월(南越)이라는 독립국을 건설하기도 하고 남하해서는, 오늘날 베트남을 건국하였다.

 

베트남은 월남(越南)으로 표기하는데, 원래 ‘베트남’이란 발음은 월남(越南)이라는 한자를 베트남식 한자음으로 발음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베트남어는 수식어가 피수식어 뒤에 오기 때문에 월남이란 말은 사실 남월이라는 말이 된다. 이는 베트남 민족이 자신들의 기원을 춘추 전국 시대의 월나라나, 한나라 초기에 세워진 남월에 두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왕충의 을 보면, 월나라 사람과 함께 나란히 왜인이 등장한다. 에는 주(周)나라 성왕 때(BC 11세기), “월상((越裳)은 흰 꿩(白雉)를 바치고, 왜인은 창초(暢草)를 바친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창초는 당시 중국 남방에서만 생산되는 특산 식물(약초)이다.

 

따라서 월나라와 함께 주나라에 공물로서 창초를 바쳤던 왜인은 일본 열도나 한반도 남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월나라와 인접한 강남 지역에서 왔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기사는 후한 시대에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주나라 시대보다 훨씬 뒤에 기록된 것이기에 우리는 이 기사를 단순한 전승에 지나지 않는다고 무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춘추·전국 시대 무렵엔, 어떤 나라가 천자가 책봉한 제후국과 교역을 할지라도 명목상 주나라가 중국 전체의 왕이 되므로, 기록상 주나라에 공물을 바치러 온 것이 된다. 예컨대 월나라 사람과 함께 왜인이 연나라와 교역을 하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기록상으로는 주나라 왕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사실로밖에 기록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사를 BC 11세기경, 강남 지역에서 배를 타고 활발한 해상 활동을 하던 월이나 왜라 불린 사람들이 화북으로 갔었다는 전승의 반영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왜인은 적어도 전국 시대 무렵까지는 한반도 남부나 일본의 서부에는 정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들은 중국 동부 연안을 따라 오키나와와 산동반도, 요동반도 등과 교역하면서 발해만으로 들어가 에서 본 것처럼 연나라와 무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족의 남하 정책에 따른 왜인의 이동

 

그런데 진·한 시대에 이르러 점차 중국의 한족이 강남 지방으로까지 확장되어 진시황 무렵에는 광동 지방까지 중국령이 되고, 한무제 때에 이르러서는 남쪽에 있던 남월까지 한나라의 직할령이 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당시 중앙 정부의 이주 정책에 따라 많은 한족(漢族)들이 강남 지방으로 남하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한족의 핍박을 피해 왜인의 일부는 해상으로 진출해 한반도 남부나 일본 서부로 이주하고, 내륙에 남아 있던 왜인들은 남하해서 화남 지역이나 베트남 민족이 되고, 다른 일부는 서남쪽으로 피신해 중국의 사천성이나 운남성 지방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같은 한인들의 남하 정책 시기에 양자강 하구의 강남 지방, 혹은 그 근처의 섬에 살던 사람들의 일부인 왜인이 한반도 남부나 일본 북큐슈로 수도농경 문화를 가지고 온 것이다. 우리가 왜를 내륙 민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같은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오(吳)나라나 월(越)나라, 혹은 요(猺)라든가 묘(苗)족은 중국의 사서에 나타나지만, 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서극 감독의 영화 <동방불패>에서 임청하가 묘족으로 나오는건 우연이 아니다. 더불어 묘족이 일본의 왜구와 더불어 반란을 도모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

그렇다면 그 지역의 섬에 살던 민족으로서 중국에 알려진 족속이 있는가? 물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우리가 찾고 있는 왜인은 아니다. 한나라 시대에 강남 지방의 해남도라는 커다란 섬에는 여족(黎族)으로 불리는 민족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왠일인지 함께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왜인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혹시 왜인이 중국 주변의 섬에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한나라 이전에 이미 왜인은 그곳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왜인조를 보면 왜인의 생활, 풍토는 모두 주애(朱崖), 담이(儋耳) 사람과 가장 가까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해남도에 살았던 여족(黎族) 역시, 주애(朱崖), 담이(儋耳)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인들의 강남 지역의 작은 섬들에 대한 그들의 정보가 한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그들이 알려지게 될 무렵인 한나라 시대에 왜인은 이미 그곳에서 나와버렸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왜인의 존재가 중국의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어도, 전승으로는 왜인이 월과 함께 남방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민족이었고, 중국과의 관계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후한 시대까지 전해져 온 것이다.

 

게다가 왜인조의 “왜인은 오나라 태백(太白)의 자손이었다고 왜의 노인이 전하고 있다”는 기사도 왜인이 강남의 원주민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전승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라는 족속은 이제 일본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동아시아에서 사라져버린 것일까?

.임청하 꼬붕으로 등장하는 왜인.. 혹은 낭인..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강남 지역에 살던 여러 민족이 남하해서 세운 광동, 광서, 귀주, 운남 또는 베트남, 라오스, 타이, 미얀마 등에 있는 소수 민족 가운데 와(Wa)족이 있다. 그들은 몬계 민족으로 불리며 베트남인과는 친척 관계에 있다고 알려진 몬족과 동족 관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마약왕 쿤사의 몰락 이후, 미얀마 라오스 타이의 접경 지대인 골든 트라이앵글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와족이다. 지금도 총을 들고 마약을 재배하는 이들의 모습엔 과거 주원장의 해민 탄압에 저항하던 왜인들의 거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골든 트라이앵글이 한국을 노린다’, KBS , 1998년 3월.)

 

물론 이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베트남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분명한 것은 와(Wa)족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왜(Wa)인은 강남 지역에서 모두 동중국해를 건너 일본 열도나 한반도 남부 등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일부는 타민족과 함께 대륙으로 남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왜인은 원래 오늘날 중국 상하이 아래 명주(회계)에 위치한 주산열도에 살던 강남 지방의 해민이었다. 그들은 처음엔 강남 지방에 살면서 중국과 교류를 하고 살았지만, 한나라의 남하 정책으로 자신들의 영토를 잃게 되자, 비한인 세력인 이들은 한인들의 핍박을 피해 각지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일부 세력이 발달된 조선술과 항해술을 이용해 자신들의 수도작 문화를 가지고 한반도 남부와 일본의 북큐슈 일대로 이주해간 것이다. 그 후 이들은 삼국 시대에 해상백제 세력으로, 그리고 백제가 당나라에 망하고 신라가 들어서자 재당신라인이란 이름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주산열도를 중심으로 중국 동해안 연안과 일본 큐슈의 진제이, 그리고 한반도 서남해안에서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819년, 당나라에서 번진의 발호가 종식되고, 대대적인 지방 제도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절강성 동부의 명주 지역을 관할하던 절동관찰사 설융(薛戎)이 묵종에게 올린 품의에 나타난 다음의 기사는 이를 웅변적으로 증명한다.

 

"절동관찰사 설융은 삼가 아뢰옵니다··· 당도의 명주에서 70여 리 떨어진 망해진에서 내려다 보이는 대해 동쪽에 신라·일본 제번(諸蕃)이 서로 경계를 접하고, 문서에 근거하여 명주에 속하지 않겠다고 청원하였습니다. 황제는 이를 허락하다.(, 권78, 제사잡록上, 元和 14년(819) 8월조.)

 

두터운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홍콩 느와르 영화 <무간도>. 홍콩의 중국반환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홍콩은 과연 중국과 영국(로스차일드 동인도회사)중 누가 누구에게 파견한 첩자일까 하는 점이었다..

번진의 발호가 종식된 819년, 당 중앙 정부에서는 번진 세력들이 임의로 설치한 군진을 원래대로 회복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지방 조직 정비에 들어간다. 이에 당시 절동관찰사로 임명된 설융도 행정 정비의 일환으로 명주 망해진(현재의 진해)에서 내려다 보이는 3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주산열도를 명주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곳 해민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며 편입을 거부하자, 당황한 설융이 묵종에게 품의를 올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같은 주산 해민들의 반발에 대한 묵종의 반응이다. 의당 이같은 해민들의 반발에 분노해야 할 묵종이 오히려 해민들의 반발을 당연시하고, 그들의 편입 거부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나라는 738년 7월, 주산열도에 옹산현을 설치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25년만인 763년 3월, 원조(袁晁)를 중심으로 한 주산 해민이 반란을 일으키며 거세게 저항하자 즉각 옹산현을 폐지하고, 이 지역을 당나라 영토가 아닌 신라·일본 제번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정한 터였다.

 

그런 까닭에 설융의 품의를 받은 묵종으로서도 자국 정부가 공식 외교 문서로 인정한 사실을 뒤엎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산열도를 근거지로 하는 왜인들은 한반도와 일본에서 백제와 왜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백제가 망하고 신라가 들어서자 ‘신라·일본제번’(재당신라인)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이어갔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주산 해민 출신인 왕건에 의해 고려가 창업되자 재송고려인이란 이름으로 송과 발해, 일본, 동남아 등을 오가며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주도해갔다. 그러다 14세기말 주원장이 잔악하게 해민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주산열도를 중심으로 중국 절강성 지역에 잔류하던 주산 해민들은 한반도와 일본으로 대거 망명을 시도한 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사서에서 주원장의 해민 탄압을 피해 한반도로 망명한 주산 해민들의 보트 피플 행렬을 ‘왜구’라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참고로 아편 전쟁 이후 중국에 조차지를 요구한 영국이 애초 눈독을 들인 곳은 홍콩이 아니라 상해에 위치한 주산열도였다. ‘영욕의 156년’, <sbs>, SBS 특집 다큐멘터리, 1997. 6월)</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