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피는 꽃/하늘 땅 바람....그리고 물, 불

춘양목- 그는 금강 소나무이다.

레이지 데이지 2012. 8. 28. 22:20

  

<미륵 반가사유상83호 그리고 일본 국보 1호>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금강산에서 울진, 봉화를 거쳐 영덕, 청송 일부에 걸쳐 자라는 소나무는 우리 주위의 꼬불꼬불한 일반 소나무와는 달리 줄기가 곧바르고 마디가 길고 껍질이 유별나게 붉다. 이 소나무는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금강소나무(金剛松) 혹은 줄여서 강송이라고 학자들은 이름을 붙였다. 흔히 춘양목(春陽木)이라고 더 널리 알려진 바로 그 나무다.
결이 곱고 단단하며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고 잘 썩지도 않아 예로부터 소나무 중에서 최고의 나무로 쳤다.

소나무는 자라면서 여러 가지 화학물질이 쌓여서 나무의 속이 진한 황갈색을 나타낸다. 이 부분을 옛 사람들은 황장(黃腸)이라 하였으며 가장자리의 백변(白邊)에 비하여 잘 썩지 않고 단단하기까지 하다.

황장이 넓고 백변이 좁은 금강소나무는 나무 중의 나무로서 왕실에 널리 쓰였다. 세종 2년(1420) 예조에서 '천자의 곽(槨)은 반드시 황장으로 만드는데 견고하고 오래되어도 썩지 않으나, 백변은 내습성이 없어 속히 썩는데 있습니다. 대행 왕대비의 재궁은 백변을 버리고 황장을 서로 이어서 만들게 하소서‘ 하는 내용이 있다. 조선왕조 내내 좋은 소나무 보호를 위하여 황장금표(黃腸禁標)를 세우고 경국대전에 좋은 소나무의 벌채를 법으로 금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금강소나무는 차츰 고갈되어 멀리 태백산맥의 오지까지 가서 벌채를 하여 한강을 이용, 서울로 운반하였다. 한강 수계(水系)로의 운반이 불가능한 울진. 봉화지역의 소나무는 그래도 생명을 부지하여 가장최근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영주-봉화-태백으로 이어지는 산업철도가 놓이면서 이들도 무차별 벌채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에는 권세 있는 양반이 아니면 지을 수도 없었던 소나무 집을 너도나도 짓기 시작하자 급격한 수요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잘려 나온 금강소나무는 춘양역에 모아두기만 하면 기차로 하룻밤 사이

서울까지 옮겨다 주었다.
사람들은 춘양역에서 온 소나무란 뜻으로 춘양목이라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진 수탈에도 그나마 남아있는 곳은 울진군 서면 소광리 일대, 봉화군 춘양면과 소천면 일대이다. 1982년 보호수, 1983년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하여 보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