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그림들

노자이야기 그림...두보의시까지

레이지 데이지 2013. 11. 11. 09:27

<미술 ..그림 이야기. 스크랩 했어요.>

 

소 등에 올라타고 길을 간다고 모두 같은 기우도(騎牛圖)가 아니다. 목동이 아니라 노인이 올라탄 기우도도 있다. 동자의 경우는 아이의 천진난만함 때문에 그림 속으로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진무구한 어린아이는 종종 자연 그대로의 가식 없는 세계를 상징한다. 그래서 그림을 진실 추구의 한 방편으로 삼았던 문인 회화관에 잘 어울리는 소재가 됐다. 그런데 아이 대신 인생의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노인이 소 잔등에 걸터앉아 있다면 어떻게 될까. 얘기는 당연히 달라질 것이다.  

 

그림 속에 소를 타고 나오는 노인은 여럿이지만 사실은 자세히 보면 한 인물이 이 소도 타고 저 소도 타고 나올 뿐이다. 김홍도가 32살 때에 그린 대작으로 국보로 지정돼 있는 그림에도 소를 탄 노인이 있다. 이 <군선도> 대작의 오른쪽에서 3번째 폭에 소를 타고 가는 노인이 등장한다. 

 

노인은 정수리 쪽에 몇 가닥 검은 머리가 보이는 것 외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으며 흰 수염이 무성하기만 하다. 손에는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있는데 읽으려는 것인지 누구에게 주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노인 머리 쪽에 둥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우라가 아니라 햇빛 가리개인 일산(日傘)이다.

 

 

김홍도 <군선도> 부분 1776년 리움미술관 

 

 

 

이 노인의 이름은 태상노군, 즉 노자이다. 노자는 이제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소를 타고 떠났다고 해서 그의 전용 교통수단은 소로 정해져 있다. 이 그림 속의 소는 제법 성깔이 있게 생긴 젊은 소로 어쩐지 뿔이 하나만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노자는 원래 신선 중의 최고 신선인 태상노군이므로 살고 죽는 것과 무관하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한번 현묘옥녀의 몸을 통해 사람으로 태어난 적이 있다. 이때 나면서부터 머리가 하얗고 귀가 길었다고 한다. 

 

노자는 최고위 신선이지만 아울러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상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대체로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은 대부분 그 출신이 사람이다. 즉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오랜 수련을 거듭해 영생술이나 신통력을 손에 넣고서 신선이 되는 게 보통이다. 노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이었던 그가 신선으로 천화(遷化)한 것이다. 그 하일라이트에 바로 소를 타고 갔다는 얘기가 나온다. 

 

공자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노자는 주나라 서고, 즉 문서보관소의 기록관이었다. 문서기록관이란 낮은 벼슬에 있던 그는 주나라 기운이 쇠해 망할 것임을 알고 떠나고자 했다. 이때 윤희라는 관리가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보라빛 기운, 즉 자기(紫氣)가 동쪽으로 흘러갔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중원과 서역을 잇는 함곡관(函谷關)의 관문지기를 불러 ‘필경 생김새가 다르고 수레와 의복이 이상한 사람이 관문을 통과할 것이니 붙들라’는 명을 내렸다. 

 

 

정선 <노자출관(老子出關)> 견본담채 29.6x23.5cm 대구 왜관수도원 

 

 

 

그러자 과연 얼마 뒤 노인 한 사람이 푸른 소가 이끄는 흰 수레를 타고 와 관문을 통과하려 했다. 관문지기는 윤희에게 달려가 ‘그와 같은 사람이 왔노라’고 보고했다. 그는 이내 조복을 차려입고 노인에게 나아가 정중한 인사를 올리고 ‘어째서 주나라를 떠나시려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노인은 시치미를 떼면서 ‘나는 가난한 늙은이로 내 밭이 관문 밖에 있어 잠시 나가 땔나무를 해오려던 참이오’ 라고 응수했다. 

 

이런 수작 몇 번 오간 끝에 마침내 노인은 ‘기특하도다. 나 역시 그대가 지키고 있을 줄 알았다’며 자신은 ‘성은 이(李)씨요 호는 노담(老聃)’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윤희의 대접을 받으며 그곳 100여일 동안 머물며 여러 수련법을 전수해 주었다. 마침내 떠나는 날이 되자 품안에서 도덕경 5천자를 꺼내 주었다고 한다. 노자가 떠나간 뒤에 윤희는 이 책으로 수련한 뒤 2년 뒤에 자신도 서역으로 가 노자를 만났고 그 이후로 두 사람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대강 이런 이야기이지만 기록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소와 관련된 것만 보면 ‘수레가 아닌 소를 타고 갔다’ ‘물소를 타고 갔다’ ‘소의 뿔이 하나다’라는 등등이 있다. 김홍도가 <군선도>에 나오는 소는 외뿔 소이다. 

 

노자 이야기 중에서 함곡관을 넘어 신선 세계로 갔다는 사실과 도덕경 5천자를 전해주었다는 일은 두고두고 기억되면서 당연히 그림세계로 들어왔다. 이른바 도석인물화의 테마가 된 것이다. 김홍도에게는 32살 때 그린 <군선도> 외에 만년에 다시 그린 노자 모습이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노자출관도>이다. 그림은 소 잔등위에 걸터앉은 노자만 그린 것이다. 품에는 역시 두루마리를 품고 있다.

 

 김홍도 <노자출관도(老子出關圖)> 지본담채 97.8x52.1cm 간송 

 

 

 

 

이 구도는 사실 김홍도 창안이 아니다. 중국 화보에 나오는 포즈이다. 명나라 말기에 나온 『홍씨선불기종(洪氏仙佛奇蹤)』(2책8권)은 신선은 비롯해 불보살, 나한 등의 간략한 전기에 삽화를 그려 넣은 책인데 여기에 소를 타고 가는 노자의 삽화가 들어있다. 삽화와 단원 그림과 다른 것은 노자를 태운 소가 소나무 아래를 지나가는 점 정도이다.  

 

홍자성 『홍씨선불기종』「노군」

 

그런데 단원이 『홍씨선불기종』 삽화를 인용하기는 했어도 그림 내용은 전혀 다른 출전에서 비롯했다. 그림 왼쪽 위에 적혀 있는 시구가 저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시귀는 ‘동래자기만함관(東來紫氣滿函館)’이고 그 아래에 ‘단원(檀園)’ 사인이 있다. 노성한 필치로 보아 만년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시구의 내용은 ‘동쪽에서 다가온 자줏빛 기운이 함곡관을 가득 채웠다’라는 뜻이다. 이 내용만 보면 노자의 유명한 일화인 ‘노자출관(老子出關)’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캐 들어가면 의외의 내용과 마주치게 된다. 원래 이는 두보의 <추흥(秋興) 8수> 중 제 5수에 나오는 구절이다. 칠언율시 8수의 연작으로 구성된 이 시에는 수많은 고유명사가 등장해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울러 대시인 두보의 시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시이기도 하다. 두보 시를 잘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 시를 읽으면서 눈에서 저절로 눈물을 흐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애잔함이 가득하다고 한다. 내용은 이렇다. 

 

 

 

秋興 제5수            추흥 

蓬萊宮闕對南山   봉래궁궐대남산

承露金莖霄漢間   승로금경소한간

西望瑤池降王母   서망요지강왕모 

東來紫氣滿函關   동래자기만함관 

雲移雉尾開宮扇   운이치미개궁선 

日繞龍鱗識聖顔   일요용린식성안 

一臥滄江驚歲晩   일와창강경세만

幾回靑瑣點朝班   기회청쇄점조반 

 

장안의 봉래궁은 종남산과 마주하고 있었고 

이슬 받는 승로반의 구리 기둥은 하늘가까지 뻗쳐있었지

서쪽을 바라보면 요지에 내려오는 서왕모(西王母) 모습이 보이고 

동쪽에서 나온 자줏빛 기운이 함곡관을 가득 채웠지 

구름이 흐르듯 꿩꼬리 궁중부채가 열리면 

햇빛은 곤룡의 비늘에 반사되어 성상의 용안을 비췄다네 

이제 장강에 병들어 누워 가을 다가오는데 놀라고 있지만 

몇 번이고 궁전의 청쇄문에서 조회를 맞이했던 몸이라네 

 

 

두보가 이 시를 지은 것은 766년 가을이다. 당시 그의 나이 55살. 안록산의 난을 피해 45살부터 떠돌이 피난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10년째로 접어들고 있던 때였다. 시를 지은 곳은 기주로 오늘날 중경시이다. 두보는 방랑생활 중에서 가장 안정됐다는 성도의 완화초당(浣花草堂) 생활을 마치고 다시 나그네 길에 올라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이해 봄에 이 기주에 도착했는데 여기서는 약 1년10개월 정도 머물게 된다. 

 

시는 젊었을 때 생활했던 수도 장안에 대한 기억과 늙고 병든 몸으로 가을을 또 맞이하게 되면서 자신의 포부를 펼칠 시간이 얼마 없다는 절망감과 서글픔 그리고 비애 등이 교직돼 있는 내용이다. 추흥이란 가을의 흥겨움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그 정반대이다. 가을이 되어 꽃이 지고 나뭇잎이 누렇게 변해 떨어지는 것을 보면 덧없는 삶에 대한 애잔함과 쓸쓸한 감정이 저절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제5수 역시 마찬가지인데 첫 부분을 보면 젊은 날 기억 속의 장안은 화려했을 뿐 아니라 곤륜산의 서왕모 전설과 연관되어 있고 또 노자의 에피소드와도 이어져있을 정도로 유서깊은 곳이었다는 것이다. 후반부는 자신도 한때 그곳에서 태양처럼 빛나는 천자의 얼굴을 배알했던 존재이지만 지금은 강호에 병들어 누워 가을이 다가오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존재로 영락했다는 절망감과 비애가 그려져 있다. 

 

이 시 전체로 보면 동쪽에서 ‘다가온 자줏빛 기운에 함곡관에 가득 찼다’는 ‘동래자기만함관(東來紫氣滿函關)’은 장안의 위용을 장식하는 무대장치에 불과할 수 있다. 노자출관의 상서로움과 노년의 비애를 그린 추풍 사이에 어떤 감정적 스탠스 위에 이 그림을 그렸는지 좀처럼 짐작이 가지 않는다. 

 

몇 가지 단서로 약간의 상상이 가능할 뿐이다. 이 그림의 단원 필치는 매우 노성하다. 즉 만년의 작이다. 그리고 최근 홍선표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그는 최대 패트론이었던 정조대왕이 죽은 뒤 매우 곤궁한 생활을 보냈다는 점이다. 특히 1799년 6월 8일에 지인에게 쓴 편지에는 김홍도는 ‘병으로 몸이 아파 괴롭다’고 하고 ‘종이 파는 지전의 주문으로 그려준 그림 값을 받지 못해 이루 말할 수 없는 낭패를 겪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1805년 12월 31일자로 전라도 관찰사 심상규가 쓴 편지에는 ‘김홍도가 굶주리고 아픈 상태로 취식(取食)을 위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덧붙여 ‘아까운 사람이 이런 곤궁과 굶주림을 겪는다는 것은 조선에서 재주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때를 못 만나는 것이냐’하고 탄식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두 기록 사이에는 몇 년의 시차가 있다. 하지만 만년의 단원은 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아마 이 작품은 그 연간에 그린 것이리라. 주문은 노자출관. 노자가 인간을 떠나 신선의 세계로 가는 그 모습은 장생불멸의 영광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붓을 든 화가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국왕의 총애가 지대했던 젊은 날은 이미 지나가고 병마와 곤궁한 삶만이 기다리는 영락한 처지의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비통하고 애절한 심정으로 읊은 두보 시를 떠올리면서 노자출관 장면 위에 그 시구를 적음으로서 대시인 두보의 고통을 자신의 비애 위에 오버랩 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다만 상상해볼 뿐이다.(*)

 

  

 

<참고논문> 

홍선표 「김홍도 생애의 재구성』,『미술사논단』 제34호 2012년상반기(한국미술연구소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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