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난민처럼 떠나는 여행

명 효능- 남경

레이지 데이지 2015. 11. 22. 20:52



난징에는 자금산이 있다.
넓은습지같은 평원에 우뚝 돌산이고 수목 또한 울울하니 명당중에 명당이라

무려 10조가 주변에 있으며

중산능과 효능 그리고 정화가 있고 손권 도 이근처 어디선가 영면하고 있을것이다.

또 비오는 오늘 21일 토욜 점심먹고 학교옆에서 20번 버스타고 명효능 주변 탐방한다.

불과 20여분뿐이 안걸린다.

메타세콰이어와 측백 글코 백양같은 플라타러스가 창창하다.

난징은 남조시대에서 현대중화민국까지 10번을 걸쳐 일국의 수도였으나 그 영화가 길지 않았다.















사루비아가 지천으로 있다.

순간 국민학교 시절이 생각나 5잎 이상 빨아 먹었다.


남경이 한 나라의 수도로서  굴욕의 시간은 바로『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삼국시대부터 남경이 한 나라의 수도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1. 건업(建業)
당시 남경은 건업(建業)이라는 이름으로 오(吳)의 수도로 번성했다. 

양한(兩漢)시대의 수도였던 낙양(洛阳)과 장안(長安)과는 거리가 있었고, 또 그 거대하고 화려한 규모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당시 건업은 일국의 수도로 충분히 기능하고 있었다. 

현재 남경의 청량산(清凉山)에는 이 시기의 유적인 석두성(石頭城)이 남아 있다. 

물론 당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것은 아니다. 
또 명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능인 명효릉(明孝陵)안에 있는 손권(孫權) 기념관 안에는 당시 석두성의 모습을 복원한 모형이 남아있다.

건업을 거점으로 한 오나라는 280년 서진(西晉)에게 멸망당하기 전까지 이른바 강남(江南)이라 칭해지는 현재의 강소(江蘇) 일부와, 절강(浙江), 강서(江西), 복건(福建), 광동(广东) 일부, 광서(广西) 일부, 호남(湖南) 일부, 호북(湖北) 일부에 영향권을 미치는 큰 세력권을 가진 국가였다. 

더불어 중원의 혼란함은 그 지역에는 극심한 피해를 주었지만, 도리어 강남 지역에는 중원의 난세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치적, 문화적으로 소외되어있던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위진 남북조
서진(西晉)의 중원 통일로 삼국시대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치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북쪽의 유목민들은 이제까지의 소외를 견디지 못하고 중원으로 침략하여 소위 5호(胡)16국 시대라 불리는 유목 왕조 시대를 열게 되었다. 자연스레 중원에 자리 잡은 서진은 남진을 거듭하여 현재의 남경에 다시 도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은 북쪽의 유목 왕조와 남쪽의 한족(漢族)왕조가 들어서는 남북조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서기 220년 한(漢) 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조비(曹丕)의 위나라부터 이 시기를 아울러 크게 위진남북조 시대라는 이름으로 칭한다.

3. 건강(建康)
남경에 자리를 잡은 동진은 다시 그 이름을 건강(建康)으로 고친다. 

역사상 두 번째로 남경이 한 왕조의 수도가 된 순간이었다. 이때 역시 수많은 북쪽의 귀족들이 남쪽으로 대피했다. 따라서 본래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재지호족(在地豪族)들과 북래귀족(北來貴族)들은 자연스레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동진은 북쪽에서부터 온 귀족들의 봉토를 전부 상실했기 때문에 새로이 군현을 설치하여 이들로 하여금 남쪽에서 살아가는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이것을 교군(僑郡)과 교현(僑縣)이라고 하며 이러한 체제를 일러 교구(僑舊)체체라고 한다. 하지만 체제의 안정을 꾀하며 남쪽에서 다시 재기를 노리던 동진 왕조는 생각보다 그 수명이 길지 못했다. 

4. 양 무제시절
그 뒤를 이어 나온 남조의 4왕조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역시 중국 역사 상 단명한 왕조들로 꼽힌다.


​5.

위진남북조의 혼란한 시기가 지나고, 

6.금릉(金陵)  

수(隨), 당(唐)의 기간에 남경은 금릉(金陵)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화려한 왕조를 구축한 당은 안녹산(安祿山), 사사명(史思明)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안사(安史)의 난으로 다리가 하나 부러지더니, 이어 황소(黃巢)의 난으로 두 다리가 완전히 부러져버렸다. 

당의 치세는 끝나고 다시금 5대 10국이라는 혼란한 시기가 도래했다.

10국 중 한 국가인 남당(南唐)역시 남경

7.
역사 상 남경이 다시 수도가 되기까지는 400여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안휘(安徽)의 농민 출신인 주원장은 당시 군벌인 곽자흥(郭子興)의 군문에 들어가 이내 그의 후계자로 발탁되었고, 급기야 곽자흥의 양녀인 마씨와 혼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마씨가 바로 주원장의 태후가 되는 마황후이다. 

이후 주원장은 각기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장사성(張士誠)과, 진우량(陳友諒)을 차례로 격파하고,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남경에 도읍했다. 

하지만 남경이 명의 수도였던 기간은, 태조 홍무제와, 건문제(建文帝 : 1398-1402) 까지의 2대, 약 40여년이 채 못 미치는 기간 이었다. 이후 영락제는 초원으로 돌아 간 원(元)의 잔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북경으로 천도했고, 

이때부터 응천부는 현재의 이름인 남경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명은 건국 과정에서의 주원장의 극악무도한 행위에 따른 저주였는지, 기이한 행동을 하는 황제가 유독 많았다. 결국 숭정제를 끝으로 하여 명의 역사는 끝이 났다. 뒤를 이어 잠시 이자성의 정권이 들어섰지만, 곧바로 청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8. 천경
청 말기, 또 다시 남경은 한 정권의 수도로 부상한다. 

바로 태평천국(太平天國)이다. 태평천국의 지도자였던 홍수전(洪秀全)은 객가(客家)출신의 소외계층을 주로 하여 광서성을 기점으로 하여 일어난 일종의 종교 세력이자, 반청(反淸) 집단이었다. 

이들은 진격을 거듭하여 남경에 입성했고, 이름을 천경(天京)으로 고쳐 수도로 삼았다.초기의 기세로는 태평천국이 청을 곧 멸망시킬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많은 서양세력들이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서의 더 많은 이권을 위해 표면상으로는 같은 종교를 믿는 태평천국에 많은 원조를 했다. 

결국 서양의 열강들은 같은 자신들과 같은 – 기독교라는 하나의 사상적인 - 가치관을 가진 세력이 중국의 주인이 되고, 또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도움을 준 것을 갑절로 돌려받을 기대를 했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 

물론 서양 열강들 자신 스스로가 태평천국의 기형적인 기독교 인식에 대해 깨달은 것도 있겠지만, 강경한 태도를 내세운 청에서 이권과 관련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계속해오자 태평천국에 대한 원조를 점차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중국 번의 상군(相軍)을 비롯한 한인 관료들의 두드러진 활약은 이미 자신의 수족들을 잘라버려 반신불수가 된 태평천국을 더욱 더 빠르게 멸망의 길로 몰아넣었다.

9..10...
시간은 흐르고, 청도 멸망하여 수천년의 황제 독재 체제를 유지한 중국도 공화정의 시대가 도래 했다. 그리고 초대 총통의 주인공은 손중산(孫中山 : 이름은 손문(孫文)이며 중산은 그의 호다. 중국식 발음으로는 쑨원)이 차지했다. 

오랜 공백을 지나, 남경은 다시 중화민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것으로 남경은 10번째로 왕조 및 정권의 수도가 된

고도(古都)가 되었다. 

하지만 민국 시기 남경은 이제까지의 여러 정권의 수도로 누린 영화로움을 한 번에 무너뜨릴 슬픔을 겪게 된다.

1937년에 일어난 남경대학살이 바로 그것이다.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은 전략적 요충지이자 중화민국의 중심지인 남경으로 진격을 했다. 37년 12월 13일 마침내 중화민국의 수도인 남경은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후 같은 달 17일까지 중국 측 추산으로는 약 20-30만명의 군인과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지금 남경 사람들의 대부분은 본래부터 남경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 대학살 이후 남경으로 건너 와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많다는 중국인들의 이야기처럼, 남경은 일본군이 휩쓸고 간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 때문인지, 일본과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남경 지역에서의 반일 감정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심하다.

'개와 일본인은 출입금지' 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식당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택시를 이용할 때면 으레 많은 일본 사람들이 한국인 행세를 하지만 금세 일본인으로 들통이 나고 승차 거부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직까지 남경에서 일본에 대한 감정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돌아 다니다 숙소로 오니 학교가 이런 모습이다.

눈군가와 같이 사진을찍고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