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 靜 ...우두커니, 멀거니/낯설게 하기

영원회귀-존재의 가벼움

레이지 데이지 2019. 8. 21. 04:57

영화 "프라하의 봄"은

세계적인 작가인 밀란 쿤데라의 작품으로 역사의 상처라는 무게에 짓눌려 단 한번도 ‘존재의 가벼움’을 느껴보지 못한 현대인의 자화상을 네 남녀의 사랑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자신을 운명이라고 믿는 여자를 부담스러워하며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토마시, 그를 끝까지 믿는 여자 테레자. 자유로운 영혼의 토마시의 연인 사비나, 자유로운 사비나에게 매료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안정된 일상을 누리던 프란츠. 생의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를 방황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육체와 영혼, 삶의 의미와 무의미, 시간의 직선적 진행과 윤회적 반복의 의미,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등 다양한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소설이 펼쳐진다.

 

■ '역사를 읽는 세 가지 방식'/ 고명섭

 

철학자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 2부 ‘삶에 대한 역사의 이로움과 해로움’에서 역사를 읽는 세 가지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1. 첫번째가 ‘기념비적 방식’이다. 기념비적 방식은 역사 속의 위대한 사건, 위대한 인물을 본받고자 하는 역사 읽기 방식이다. 위대한 사건과 인물은 모범으로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영감과 자극을 준다. 협상의 기술로 거란을 물리친 ‘서희’나 해전사의 금자탑을 세운 ‘이순신’을 호출하는 것이 이런 역사 읽기의 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2. 니체가 두번째로 거론하는 것은 ‘골동품적 방식’이다. 이 방식으로 역사와 만나는 사람은 과거가 물려준 모든 것을 골동품을 대하듯 소중히 여긴다. 나무의 뿌리가 토양을 어루만지듯이 역사와 문화를 아끼고 돌본다. 선조가 살아왔고 자기가 살고 있으며 후손이 살아야 할 곳이므로 이 땅의 역사를 가슴에 품어야 할 것으로 느끼는 것이다.

 

3. 세번째는 ‘비판적 방식’이다. 이 방식으로 역사를 읽는 사람에게 역사는 위대한 것만도 사랑스러운 것만도 아니다. 역사는 비판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불만족스럽고 견딜 수 없는 현재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과거이기 때문에 역사는 기소돼야 하고 탄핵당해야 한다. 그 비판과 부정 속에서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있다. 일제에 나라를 넘긴 친일파의 행적이 바로 그런 비판적 역사 읽기의 대상이 될 것이다.

 

니체가 그 역사론에서 강조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역사가 단순한 지식이나 교양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는 우리 삶에 봉사해야 한다.

그래서 니체는 글의 서두에 괴테의 말을 인용한다. “내 활동을 키워주거나 내 삶에 활기를 불어넣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가르치려고만 드는 모든 것을 나는 혐오한다.” 삶의 활력을 키워주지 않는 역사 지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마찬가지로 니체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앎의 유희로 끝나는 역사 읽기도 거부한다. “지식의 정원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는 버릇없는 게으름뱅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역사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런 역사가 아닐까. 일본의 무모한 ‘역사-경제 도발’에 맞서 우리의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유용한 역사, 우리를 짓누르려 하는 힘들에 맞서 투쟁하는 데 쓸모있는 역사를 공부할 때다. (한겨레신문/ 고명섭 논설위원)

 

 

영원 회귀(永遠回歸, 영어: eternal return, eternal recurrence)

 또는 같은 것의 영원 회귀(Ewige Wiederkunft des Gleichen)는 니체 철학에서 볼 수 있는 근본사상의 하나로 "똑같은 것이 그대로의 형태로 영원에 돌아가는 것(回歸)이 삶의 실상(實相)이다"라는 생각이다. 모든 생성(生成)을 한 원환(円環) 안에서의 되풀이로 보는 이 사상에서는 모든 점이 바로 중심점(中心點)이 되기 때문에 현재의 이 순간이 영원한 과거와 미래를 응축(凝縮)시킨 영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되며, 이리하여 현재의 모든 순간, 현실의 이 대지(大地) 위의 삶 자체가 그대로 영원한 가치로 이어져 힘차게 긍정되어 간다는 것이다.

 

니체의 후기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이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처음 제창되었다.

 

'시간은 무한하고, 물질은 유한하다'라는 전제에서 무한의 시간 중에서 유한의 물질을 조합한 것이 세계라면, 현재의 세계가 과거에 존재해, 혹은 장래도 재차 완전히 같은 조합으로부터 구성될 가능성에 대해 시사하고 있다. 니체에게 이 세계의 원환적 구조는 단순히 존재론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 의지의 문제와 묶을 수 있다.

 

영원 회귀하는 것은 종말을 맞이하는 일 없이 때를 넘겨 동일한 것으로 하고, 한편 만물이다. 만물제동. 즉, 영원 회귀는 종말에서의 구제라는 옵티미즘과의 대비로 자주 염세주의와 결부되어 말해지지만, 그 한편, 구제되도록 지금의 행동을 바로잡는다는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밝기도 있다. 세계가 몇 번 둘러싸 와도, 지금 여기에 있는 순간이 쓰는 있는 것을 바란다는 강한 삶의 긍정의 사상이기도 하다. 그 의미로, 영원 회귀는 삶을 소홀히 하지 않는 초인에게만 맡는 것이 가능한, 존재와 의지와의 자유의 경지이다. 영원 회귀는 단순한 숙명이 아니고, 자유 의지에 의해서 초래되는 세계의 근원적인 상태인 것이다.

 

영원 회귀는 삶에의 강한 긍정의 사상인 것과 동시에, '1회성의 연속'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전생 사상과 같이 전생→현세→내세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결코 없고, 인생이란 카셋트 데이프와 같이 만일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그 해 그 때 그 순간까지, 완전히 같이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만일 2006년, 당신은 파란 옷을 입고, 흰 바지를 신어 2시에 역앞의 학원행 버스정류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하자. 삶이 다해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2006년, 당신은 파란 옷을 입고, 흰 바지를 신어 2시에 역앞의 학원행 버스정류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리셋하고 카셋트 데이프를 되감았을 뿐인 상태가 된다. 이것이 '1회성의 연속'이다. 그것을 영원히 반복한다. 고로, 당신의 인생에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렇다'라고 말하기 위해, 강한 인생에의 긍정이 필요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스스로 기른 어둠에 먹혀 죽는 환영을 본다. 최고에는 항상 최고 깊이로부터. 초인은 신들의 황혼에 강력하게 나타난다. 어둠을 알아, 어둠을 파해, 죽어 더 삶에의 강한 '그렇다'를 반복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순간의 당신에게 강하게 수긍하는 태도, 그야말로가 초인에게의 길이며, 영원 회귀의 근간이다.

 

니체 자신은 영원 회귀의 사상을 암시에만 머문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로, 물리학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그 근거의 하나로 하고 있다.

 

영원 회귀에 대해 니시베 스스무(평론가)는 말했다. '찾아내야 하는 것은 실재(진리)지만, 실재는 말을 거처로 해, 그리고 자신이라는 존재는 그 거처의 지키는 사람을 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말이 역사라는 이름의 초원을 이동하면서 실재를 옮기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자신이라는 존재는 그 목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 지키는 사람이든지 목자든지의 삶을 통해서 서서히 원으로부터 되어 오는 것은, 실재는, 거기에 있으면 지시받고 있는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인식되는 것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무(無)'라고 부르면, 인간은 실재를 요구하고, 자신이 무에 영원히 회귀할 수 밖에 없다고 안다. 즉 니체의 '영원 회귀'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무와 관계되는 것으로서의 인간에게서의 실재의 모습이다.'[1]

 

니체는 영원 회귀를 직감적, 문학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그 체계적인 의미는 불명료하다.

 

단지, 종교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영원 회귀는 크리스트교적인 내세나 동양적인 전생의 부정이며, 철학사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변증법의 부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니체는 영원 회귀를 말해, 변증법을 부정하는 것에 의해서, 근대화 그 자체, 사회는 보다 좋아져 가는 것이라는 서양적인 진보 사관 그 자체를 뒤집으려고 했던 것이다. 변증법은 근대 철학의 완성자라는 헤겔의 기본 개념이며,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근대 철학을 뒤집으려는 시도였다. 니체의 영원 회귀의 사상은 포스트 모던의 근대 비판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모든 선악, 우열은 인간의 주관적인 믿음에 지나지 않고, 절대적인 선악 뿐만이 아니라, 상대적인 선악도 부정하는, 가치 상대주의의 극한이라는 점에서는 부처의 제행무상·제법무아, 장자의 만물제동론에 가깝다. 절대 정의를 말하는 크리스트교의 강한 서양사상보다, 동양 사상에 잘 볼 수 있는 발상이다. 하지만, 불교에 대해서는 대관이라고 니체는 부인하고 있으므로, 영원 회귀는 더 능동적이다. 모든 것은 평등하게 무가치이며, 마지막도 시작도 없는 영원 회귀라는 궁극의 허무주의로부터, 운명애에 이르러, 무로부터 신가치를 창조, 확립하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을 니체는 초인이라 부른다. 속박도 전통도 질서도 완전한 무인 것은 거기로부터 모든 신가치, 신질서가 구성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원 회귀 비판

 

그러나, '역사의 종말'을 쓴 프랜시스 후쿠야마들에게 비판되듯이, 축적하고 있는 지식이나 역사가, 근대화라는 불가역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회과학적인 사실이며, 영원 회귀의 사상은 인류 역사적인 스탠스에서 보면 잘못이다. 역사는 반복하고 있는 것 같고, 변증법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자연과학적 관점에 서면,

1. 세계는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에 의해 항상 확산·다양화해 나가므로 유사한 상황이 재현되어도 전혀 같은 상황이 재현될 것은 없다는 열역학 목표 견해나, 2. 유한의 계에 무한의 시간을 주어도 반복이 일어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한 혼돈 이론, 혹은,

3. 본질적으로 불확정성을 내포하는 양자론 등, 특히 물리학에 의해서 영원 회귀를 부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 니체의 능동적 허무주의는 나치스에 베르사유 체제 타파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어 결과적으로 유럽에 파멸적인 전재를 주었다. 전후, 신좌익의 젊은이들의 사이에서도 유행해, 그들의 찰나적이고, 망동적인 폭력 행위를 부추겼다. 절대적인 선악 뿐만이 아니라, 상대적인 선악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만행이나 흉행도 모두 용서된다는 위험사상에 용이하게 직결한다. 그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쉬운 위험성과 반성으로부터, 철학자 나가이 히토시는 그 패배의 완벽함에서의 사상적인 의의를 찬미 하면서도, '니체는 사상가로서는 패배했다. 마르크스에게는 부활의 가능성이 있지만, 이미 니체에게는 없다'라고 지적했다[2].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유태적 대등 욕구(노예 도덕)는 게르만적 우월 욕구(귀족 도덕)에 승리했다'[주 2]라고 지적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역사에는 목적이나 마지막이 있다고 하여, 역사의 마지막을 말했다. 붓다는 '코뿔소의 뿔과 같이 혼자 걸을 수 있다'라고 말해, 허무주의의 정치화를 경고하고 있다.

 

영원 회귀는 과학적으로 확정되는 현상이나 정치사상으로서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실존주의의 자세의 기둥의 하나이며, 개인의 심리적 현상내에 의해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니체는 개인 환상의 범위내라면, 인간은 인과율도 시간축도 넘을 수 있는 것을 외쳐, 개인 환상의 절대적 자유를 주장하고 싶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나가이 히토시는 영원 회귀는 사상보다, 어느 날 돌연 니체를 덮친 체험인 점을 강조했다[3].

 

나가이 히토시는 니체 철학은 철저히 한 '물음'이라 지적하고 있다. 확실히 니체 철학은 광기를 배고 있지만, 그것은 무지나 단락적 사고로부터 오는 광기는 아니다. 일반인이라면 적당한 곳에서 그만두어 버리는 의문을 계속 물은 결과이며, 철학적 사색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광기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가치 상대주의를 말하지만, 모든 가치를 계속 상대화하면, 절대적인 선악 뿐만이 아니라 상대적 선악도 부정되어 버려, 궁극적으로는 선악 모든 것이 무의미화하는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는 국민의 평등을 말하지만,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가치가 있는 것은 모든 국민에게는 평등하게 가치가 없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크리스트교는 보편애를 말하지만, 모든 것을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인 것은 아닌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니체의 근대 비판은 본질적으로 근원적이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곤란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영원 회귀의 능동적 허무주의로부터 귀족 도덕의 부활을 말하는 니체 사상은 현대인의 시점으로는 위험사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다수파의 지지를 받을 리는 없고, 이미 정치사상으로서 부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 점에서 니체는 사상가로서는 틀림없이 완패했다. 그러나, 감각적으로 거부할 수 있어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곤란한 점이 니체 철학의 특징의 하나이다.

 

영원 회귀 비판

그러나, '역사의 종말'을 쓴 프랜시스 후쿠야마들에게 비판되듯이, 축적하고 있는 지식이나 역사가, 근대화라는 불가역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회과학적인 사실이며, 영원 회귀의 사상은 인류 역사적인 스탠스에서 보면 잘못이다. 역사는 반복하고 있는 것 같고, 변증법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자연과학적 관점에 서면,

1. 세계는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에 의해 항상 확산·다양화해 나가므로 유사한 상황이 재현되어도 전혀 같은 상황이 재현될 것은 없다는 열역학 목표 견해나,

2. 유한의 계에 무한의 시간을 주어도 반복이 일어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한 혼돈 이론, 혹은,

3. 본질적으로 불확정성을 내포하는 양자론 등, 특히 물리학에 의해서 영원 회귀를 부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 니체의 능동적 허무주의는 나치스에 베르사유 체제 타파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어 결과적으로 유럽에 파멸적인 전재를 주었다. 전후, 신좌익의 젊은이들의 사이에서도 유행해, 그들의 찰나적이고, 망동적인 폭력 행위를 부추겼다. 절대적인 선악 뿐만이 아니라, 상대적인 선악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만행이나 흉행도 모두 용서된다는 위험사상에 용이하게 직결한다. 그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쉬운 위험성과 반성으로부터, 철학자 나가이 히토시는 그 패배의 완벽함에서의 사상적인 의의를 찬미 하면서도, '니체는 사상가로서는 패배했다. 마르크스에게는 부활의 가능성이 있지만, 이미 니체에게는 없다'라고 지적했다[2].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유태적 대등 욕구(노예 도덕)는 게르만적 우월 욕구(귀족 도덕)에 승리했다'[주 2]라고 지적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역사에는 목적이나 마지막이 있다고 하여, 역사의 마지막을 말했다. 붓다는 '코뿔소의 뿔과 같이 혼자 걸을 수 있다'라고 말해, 허무주의의 정치화를 경고하고 있다.

 

영원 회귀는 과학적으로 확정되는 현상이나 정치사상으로서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실존주의의 자세의 기둥의 하나이며, 개인의 심리적 현상내에 의해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니체는 개인 환상의 범위내라면, 인간은 인과율도 시간축도 넘을 수 있는 것을 외쳐, 개인 환상의 절대적 자유를 주장하고 싶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나가이 히토시는 영원 회귀는 사상보다, 어느 날 돌연 니체를 덮친 체험인 점을 강조했다[3].

 

나가이 히토시는 니체 철학은 철저히 한 '물음'이라 지적하고 있다. 확실히 니체 철학은 광기를 배고 있지만, 그것은 무지나 단락적 사고로부터 오는 광기는 아니다. 일반인이라면 적당한 곳에서 그만두어 버리는 의문을 계속 물은 결과이며, 철학적 사색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광기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가치 상대주의를 말하지만, 모든 가치를 계속 상대화하면, 절대적인 선악 뿐만이 아니라 상대적 선악도 부정되어 버려, 궁극적으로는 선악 모든 것이 무의미화하는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는 국민의 평등을 말하지만,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가치가 있는 것은 모든 국민에게는 평등하게 가치가 없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크리스트교는 보편애를 말하지만, 모든 것을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인 것은 아닌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니체의 근대 비판은 본질적으로 근원적이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곤란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영원 회귀의 능동적 허무주의로부터 귀족 도덕의 부활을 말하는 니체 사상은 현대인의 시점으로는 위험사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다수파의 지지를 받을 리는 없고, 이미 정치사상으로서 부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 점에서 니체는 사상가로서는 틀림없이 완패했다. 그러나, 감각적으로 거부할 수 있어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곤란한 점이 니체 철학의 특징의 하나이다.니체 최말년의 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유명한 용어.

 

독일어로 ewige Wiederkunft 또는 ewige Wiederkehr des Gleichen. <영원회귀>라고도 한다.

 

니체는 유럽이 의거해온 일체의 것을–주체나 의식이나 이성이라는 개념도, 과학이나 종교나 민주주의도–생의 실상에서 벗어난 허위라고 간파했다. 이들 배후에 있는 플라톤주의나 그리스도 교도 실은 허무주의의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그에게, 유일한 실재는 생성의 전체로서의 자연이며, 생의 유일한 원리는 〈힘에 대한 의지〉이다. 근대적인 이성의 역사와 그 진보신앙은 단순한 막간극으로서 그 의의를 상실하고, 존재 전체의 근본성격은 무한한 시간 안에서의 유한한 〈힘에 대한 의지〉의 연극, 즉 영겁회귀라고 그는 말한다. 무한한 시간 안에서의 유한한 조합인 이상, 한 번 있었던 일은 반드시 또한, 아니 무한회에 걸쳐서, 그것도 그런 인식의 발견도 무한회에 걸쳐서 반복된다고 하였다. 니체가 1881년 여름, 알프스 산중에서의 산책 도중, 갑자기 번개처럼 이 사상이 엄습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마침내 그는 『짜라투스트라』에서 이 사상을 체현하는 초인에 대한 전생의 이야기를 쓰게 되는데, 이런 사상 전체의 배후에는 이성에 대한 불신, 역사에 대한 권태라는 세기말의 시대정신이 반영된다. 또한 엘리아데도 『영원회귀의신화』(1949) 등에서 전승문화에 있어서의 조형(祖型)에 대한 회귀(제사에서의 선조나 신들의 위업의 재현)나 역년적 시간의 주기(성스러운 것과의 교섭에 의한 전환을 알리는 신년과 같은 연중행사)에 있어서의 회귀 사상의 의의를 근대적 이성의 역사중심주의에 대비시켜서 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