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던 곳이라 이웃의 마음으로 요즘의 위기를 이겨낼까? 걱정이 들어 응원차 방문했는데 손님도 많고 고기 맛도 좋았다. 유명한 상권은 최근 기울고 지역에 뿌리를 내린 상권은 나름 버티는 것을 보면서 살아남는 지혜도 덤으로 배운다. 식당에서 나오면 서울로7017길이 이어지기에 충무로집까지 걷기로 하고 걸었다.
서울역 강우규의사의 동상이 보인다. 교회장로이고 한의사였던 당시 나이로 고령인 65세 이분의 찐한 나라 사랑과 평화의 추구가 가슴에 남아 이분과 관련된 글들을 최대한 찾아서 읽고 묵상한다.
이런 말이 있다. 나이가 들면 입을 닫고 지갑을 열라고... 다 맞는 말은 아니다. 돈이 없다면 어른은 줄 수 있는 것이 없단 말인가! 란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강우규의사처럼 어른의 꿈을 갖고 나누는 것이다.
라떼 어른이 아니고, 태극기어른이 아닌 청년 어른, 멘토 어른의 모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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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샘은 “내가 원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산천을 사랑한다는 얘기다” 하였다. 원주에 있는 박경리 문학공원에 있는 박경리샘의 동상을 본 분이라면 그의 동상이 참 정겹게 느낄 것이다. 토지에 나오는 600여명의 인물군 중에 누가 가장 애착이 가냐고 기자가 박 샘에게 질문할 때 박 샘은 주저 없이 남도 사내인 ‘주갑이’ 라고 말했다. 주갑이의 외사랑이던 기화(봉순)의 죽음을 듣고 학처럼 춤을 추면서 눈물짓던 사내... 박 샘은 그를 “염치 바르고 마음 여리고 소심하면서 자존심을 하늘을 찌르는...” 라도 묘사했다
토지를 보면 주갑이는 남의 고기를 훔쳐 먹다가 봉순이에게 걸려 체하게 되는데 한의사 강우규에게 치료를 받는다. 이후 그는 “나의 구국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을 쟁취하는 것이고 둘째 세계 독재자들을 타도하여 평화위에 세계 공존을 이룩하는 것이다. 이 일을 내가 함에 따스함으로 응원해달라" 는 강우규의사의 생각과 애국심에 감동은 주갑이는 강우규를 따라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돕는다. 토지에 나오는 한의사 강우규는 실존인물이었고 실명이었다.
1919년 3.1운동이후 45살 이상 70세 이하의 노인동맹단이 결성된다. 이 모임은 청년들의 멘토로 교육과 경제적 지원을 하는 독립단체였고 강우규 (1855~1920)는 여기에 중심인물로 활동한다. 그는 1919년 9월2일 조선 새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수류탄을 던졌다. 3.1만세이후 일본은 문화통치로 바꾸는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훨씬 교활했다. 사이토 총독이후를 보면 사이토는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조선의 역사를 일본 학자들이 쓰게 하고 친일파 역사학자를 참여시킨다.
대표적인 학자가 이병도였고 이들은 해방이후 재야 학자들은 빨갱이로 박해를 하고 지는 한국 사학계의 태두가 된다. 일제시대 조선 역사책 20만권이 불태워지고 또 일본으로 넘어가며 조선의 역사는 왜곡되었다. 이런 일본의 위장을 알고 있던 강우규는 멀리 보고 근본을 보는 애국심이 있었기에 사이토를 응징했던 것이다.
1920년 11월 29일 10시 30분 서대문형무소에서 강우규는 처형된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쾌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라도 당당히 말한다.
우리나라가 인구 감소에 살아남으려면 여성인구와 노령자 인구의 사회화 전문화가 되어야 한다. 여성 인력이 경제 인력이 되고 사회를 위해 일하는데 그동안 정진이 있었다. 조금만 더 세련되고 향상된다면 대한민국의 인적 인프라는 탄탄할 것이다. 고령인구가 경제적 대체 세력이 되었는가를 보면 아니다. 희망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고령자들이 유연성과 창의성과 용기는 거의 바닥수준이다. 정치적으로는 극우 보수이고 문화적으로는 단절과 고집이 강하다.
이런 시대에 100년 전에 돌아가신 강우규의사가 깊게 조명된다. 65세에 일제 리더십 심장을 공격하는 결기, 그리고 교육과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는 그의 태도태도가 우리 고령층이 감당한다면 이것이 곧 국력일 것이다.
한 가지 의미 있는 것은 4.19혁명시 서울대 학보사 기자를 했던 조각가 심정수 작가가 원주에 있는 박경리 동상을 제작했고 서울역에 있는 강우규의사 동상을 제작했다는 것이다. 조각가 심정수 샘은 민중미술운동을 이끌었던 ‘현실과 발언’ 창립 동인 이었다.
강우규의사가 마지막 순간 남긴 최후의 유언이다. “단두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 구나, 몸은 있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겠는가!” 코로나 이후 세계는 국가주의로 간다. 나라의 부강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고령자가 고 위험군이 아니라 지혜와 평화, 용기와 넓이의 허브가 될 수 있는 것을 강우규의사는 보여주었기에 그의 삶을 주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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