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아차산성

레이지 데이지 2010. 5. 23. 10:27

아차산성(阿且山城)

 

-종 목 사적 제234호 
-지 정 일 1973.05.25
-소 재 지 서울 광진구  광장동 산16-46,구의동 산1-2 

 


서울시 광진구 아차산(해발 285m)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다. 성 전체 길이는 1,125m이며, 성벽의 높이는 평균 10m 정도이다. 동·서·남쪽에 문이 있던 흔적과 물길이 남아있고, 문 앞을 가려 보호하는 곡성이 남아있다. 그 밖에 여러 건물터가 남아있는데, 많은 토기와 기와조각이 수습되었다. 아차산성에는 2가지 슬픈 역사가 전해온다. 하나는 백제의 수도 한산이 고구려에 함락되었을 때 개로왕이 성 아래에서 죽임을 당했으며, 다른 하나는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장군이 죽령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하여 신라군과 싸우다가 이 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것으로, 이러한 전설을 간직한 온달샘이 성안에 있다. 1997년 아차산성 보루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100여점의 토기류와 30여점의 철기류, 100여점의 철제 무기류를 비롯한 수 많은 유물들이 나왔는데, 주로 고구려 계통의 토기들이 보이고 있어 고구려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백제의 옛 도읍지에 있는 아차산성은 누가 쌓았는지에 대해 아직 논란이 있지만 삼국이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으로 그 의의가 있다.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에 있는 삼국 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둘레 약 1,125m이다.

아차산(阿且山: 아차산(峨嵯山))의 남쪽으로 경사진 산허리의 윗부분을 둘러쌓은 테뫼식산성으로

현재 동·서·남쪽에 문지와 수구터가 있고, 북쪽과 서쪽·동쪽 등의 회절(回折)하는 곳마다에

곡성(曲城) 겸 망루터가 있다.

일명 아단성 (阿旦城) 또는 아차산성(阿且山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으로도 불린다.

축성 연대는 백제가 한강 유역에 도읍하였을 때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여 쌓았다는 견해가 있다.

산성은 표고 205m의 산꼭대기에시작하여 동남의 한강변 쪽으로 경사진 산허리의 윗부분을 둘러쌓았는데

규모가 매우 커 성내에 작은 계곡이 있다.

 

성벽의 구조는 기복적으로 삭토법(削土法)에 의하여 대체의 형태를 축조한 뒤 그 뒷부분을 따라 돌아가면서

성벽의 내외협축(內外夾築)으로 쌓았고, 성벽 바깥쪽의 아래는 다시 계단식의 경사가 완만한 보축을 돌리고

있다. 현재는 석축 부분이 무너져 토석혼축(土石混築)과 같은 외형을 이루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밖에서 보면

평균 10m정도이지만 그보다 더 높은 곳도 있다. 내측에서는 1∼2m 내의 높이로 보이지만 흙속에 묻혀있는

성벽은 석축이 2∼4m의 수직으로 남아 있다. 수구(水口) 부근은 평탄해져서 내벽은 남아 있지 않으나,

기초 부분은 묻혀 있으리라 여겨진다. 성밖으로 강변 나루터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는 좌우 양편의 지형을 이용, 삭토(削土) 혹은 판축(版築)하여 성벽을 연장하였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나,

지금은 주택들이 들어서서 그 원형을 잃게 되었다.

 

특히 이 산성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남쪽에 있는 풍납리토성(風納里土城)과 함께 백제 수도의 운명을

좌우하는 도하처(渡河處)를 수비하기 위하여 쌓은 중요한 성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은 삼국사기(三國使記)에 기록된 백제 시대의 유명한 아단성(阿旦城) 혹은 아차성(阿且城)으로 비정하고 있다. 한편, 백제(百濟)의 수도 한산(漢山)이 고구려(高句麗)에 함락되었을 때 개로왕(盖鹵王)이 이 성 아래에서 피살되었으며, 고구려(高句麗) 평원왕(平原王)의 사위 온달(溫達)이 죽령 이북의 실지(失地)회복을 위하여 출정하여 신라군(新羅軍)과 싸우다가 역시 이 성 아래에서 전사하였다는 역사적 전설이 성안의 샘을 온달샘이라하여 전해지고 있다.

성안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유물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성터로 여겨지고 있다.

 

 

▶峨嵯山(아차산)과 阿且山城(아차산성)

 

-광진구 아차산 입구 ‘한자표기 안내표지판’설치


광진구는 27일 아차산 입구에 아차산(峨嵯山)과 아차산성(阿且山城)의 한자 표기에 대한 안내표지판을 설치했다. 아차산이 도심속 쉼터로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게 되면서 아차산(峨嵯山)과 아차산성(阿且山城)의 한자표기가 다른 데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표기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안내표지판을 아차산을 찾는 이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등산로 입구에 세웠다.아차산 입구의 정덕훈 시비 옆에 설치된 세로 60×가로 40×높이 110㎝ 크기의 안내표지에는 삼국사기 같은 역사적인 자료를 근거로 한자표기가 다른 이유를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안내표지판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아차산성에 대한 가장 앞선 기록인 ‘광개토왕비’(414년)에는 ‘아단성(阿旦城)’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阿旦’은 한자의 소리(音)을 빌어 표기한 것이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아차성(阿且城)’으로도 표기되면서 이후 ‘阿旦’보다는 ‘阿且’가 쓰였으며, 고려시대 후기부터는 본래의 ‘아차’에 뜻(訓)을 부여한 ‘峨嵯山’이 쓰이면서 현재까지도‘峨嵯山’,‘峨嵯山城’으로 표기해왔다. 그러나, 아차산성의 경우 1973년 국가사적 제234호로 지정·고시할 때 ‘삼국사기’를 근거로 삼아  공식 안내문 등에서는‘阿且山城’으로 표기되고 있다는 것.정송학 광진구청장은 “아차산(성) 한자표기가 바뀌어온 과정을 살피는 것 자체도 역사공부이자 스토리텔링”이라며 “안내표지판이 설치됨에 따라 아차산성 한자표기에 대해 궁금해하던 구민과 아차산을 찾는 많은 이들의 궁금증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2009년07월28일 13시58분  아시아일보 조재현 (best8944@hanmail.net) 기자>   
 

▶아차산성 - 민병두 두레문화기행 연구간사 


    한눈에 한강을 훤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아차산(峨嵯山, 혹은 阿且山)을 권하고 싶다.

아차산하면 그 이름의 어감 때문에 왕이나 장군 혹은 유명한 문인 등의 어떤 일화

(이곳을 지나다가 무릎을 칠 정도의 후회를 하게되었다는 등의 일화)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묘한 연상을 불러일으키게 되지만 막상 그 연원을 들어보면 거리가 영 멀다. 

원래 이곳의 이름은 아단(阿旦)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조선조에 태조 이성계의 이름에 단(旦)자가 들어있어

비슷한 차(且)로 변경(피휘라고 한다)해서 아차가 되었다는 유래도 있고,

혹은 《삼국사기》에서 보듯 차와 단이 서로 섞여 쓰이다가 어느틈엔가 차로 정착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이곳 아차산의 위치를 물어보면 서울에 오래 살았던 사람조차도 어디라고 금방 대답할 수 없을 만큼 오늘날에는 그 존재가 미미해진 것이 아차산이다.

더욱이 그곳에 산성(아차산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욱 찾기 힘들지 모르겠다.

하지만 워커힐이 어디있는지 물어본다면 아마도 어렵지 않게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다음 그 유명한(?) 워커힐이 등을 기대고 있는 산이 바로 아차산이라고 하면 "아! 그래요(?)"다.   

만일 똑같은 질문을 한성백제 때의 서울 사람들에게 물어봤다면 아마, 혹시 간첩아니야 하는 의구의 눈초리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거의 정설이 되다시피한 한성 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의 한강 맞은편에 이 성이 위치해있고, 위치상 고구려침입에 대한 최후의 보루가 이곳일 수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도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아차산성의 수비를 강화한 내용의 기사가 실려있을 정도이다. 건국 초부터 고구려와 끊임없는 경쟁 관계를 견지해온 백제로 보면 자신의 도읍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과 같은 아차산성을 잘 정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결국 475년에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밀려 도읍을 옮기게 된다.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개로왕이 장수왕의 파상 공격에 그만 붙잡히게 되었고, 이곳 아단성에 끌려와 끝내 비운의 죽임을 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침입하자 신라에 원병을 구하러 갔던 아들 문주왕은 원병 일만을 이끌고 돌아오던 중에 왕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고구려와의 일전을 도모하지만, 당시의 여건과 주위의 만류에 밀려 그만 도읍을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백제의 한성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역사의 현장이었던 아차산성과 그 주위의 유적들을 둘러보자.  

우선 아차산성은 아차산 공원 관리사무실의 왼쪽으로 난 아차산 공원길로 접어들어 그 길을 따라 쭉 한 20분 정도 올라가다보면 오른쪽에 아차산성이 있음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곳의 소유권이 워커힐에 속해 있어 접근을 금지하는 철조망을 먼저 만나게 된다. 철조망너머로 산성을 확인해도 되고, 군대에서 하듯 철조망 타기를 통해 고지(?)를 탈환하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도 있다.  어쨌든 아차산성은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6각형에 가까운 약간 길쭉한 평면에 전체 길이가 1,125m이고, 내부면적은 약 2만 5천평 크기의 성으로 밝혀졌다. 동벽과 서벽은 지형적인 여건을 이용하여 능선을 따라가며 축조되었고, 북벽과 남벽은 경사면에 기대어 쌓은 석성이다. 특히 북벽의 경우는 8~10m 높이에 70~80°나 되는 급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임에도 능선 말단부의 남쪽 지역을 적절히 이용하여 성내에 우물과 작은 계곡이 흐르는 포곡형에 가까운 형태를 갖추고 있다.

 

    산성의 북쪽 끝 해발 205.5m 지점에는 장대지가 있다. 흙과 돌을 섞어 주변보다 높게 돋궈 올렸고, 긴 쪽은 12m, 짧은 쪽은 9.4m 가량 되는 타원형에 가까운 평면을 하고 있다. 여기 외에도 굽어지는 지점마다 돌출된 각루가 있고 또 평탄하게 조성된 점으로 미루어 소규모 장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아차산성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또 하나의 보루를 살펴볼 수 있는데, 그곳은 아차산 공원 관리사무실의 오른쪽으로 보이는 야트막한 동산에 있다. 그 동산에 오르는 길을 따라 숨이 약간 차 오를 정도 산길을 걷다보면 몇 군데의 유적을 만날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산등성이에 패인 조금 넓은 웅덩이 정도로만 여겨져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공을 가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참호보다는 훨씬 큰 데, 삼국 전쟁이 한창일 때 만들어졌던 토루라고 한다.

    아차산 전역에 있는 유구들은 크게 아차산을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이 다르다고 한다. 이곳이 백제에 의해 지배되고 있을 때에는 북에서 쳐내려오는 고구려를 방비하기 위한 전방 기지였고, 고구려가 이곳을 쟁취한 후에는 남쪽에서 쳐 올라오는 백제를 방어하기 위한 전초 기지였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방어 대상을 달리하는 까닭에 수비 위치도 달라졌고, 그 결과 서로 상이한 양식의 유구가 남아있게 된 셈이다.

 

 장성
그냥 산으로 오르는 평범한 산길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왼편과 오른편 보다 높게 솟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좀더 오르면 이 길이 깍아지른 듯한 절벽 위로 이어진다. 


    한편, 아차산 공원으로 들어서면 그 왼쪽으로 영화사가 눈에 띈다.

그 뒷쪽으로 길을 잡아 올라가면 장성(장한성)의 유구를 만날 수 있다. 주변보다 돌무더기가 좀더 눈에 띈다는 점외에는 별다른 느낌도 없는 등산로에 불과하지만 주위보다 약간 높게 턱을 이루고 있고 사람의 손에 의해 쌓인 것임이 확인 가능하다. 한때 뚝섬을 중심으로 하는 살곶이목장의 담으로도 알려졌던 곳이다.

살곶이목장은 조선 태조 때부터 태종 때까지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국립목장이다. 그 둘레가 약 20㎞에 이르는 것으로 아차산 줄기를 동쪽 경계로 하고, 배봉산에서 한양대가 자리잡은 구릉까지를 서쪽 경계로 하고 있다.

북쪽 경계는 중랑교 아랫쪽에서 면목동 위쪽의 아차산 줄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곳에선 말을 놓아 기르는 한편 왕이 참관하는 시위대의 군사 훈련과 열병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쨌든 장성은 아차산 보루를 연결하는 형식으로 길게 축조되어 한강 하구를 비롯하여 서·북 방향에서의 적을

방어하는 목적에서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근처에서 다량 출토되고 있는 백제 토기편은 장성의 존재가 바로 도성의 외곽에 대한 강화된 방어력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그 능선에 올라보면 한강 상류뿐만 아니라

63빌딩이 있는 하류까지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어 전략적 요충으로서 이보다 훌륭한 곳이 있을까 싶다.

 

고분
아차산 전역에는 많은 고분이 산재해 있다. 지금은 거의 다 훼손되어 쉽게 찾을 수 없다. 장성의 정상 부근에서 아차산 쪽으로 내려오는 중턱에 방치되어 있는 이 고분은 그래서 매우 아쉬운 느낌을 준다.  


더욱이 이 지역에는 당시의 고분이 여기 저기 산재해있는데, 그 수효가 무려 150여기가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 중 확인된 70여기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수혈식 석곽묘인데, 풍화 암반 지대를 파고 그 위에 20~30㎝ 정도 크기의 다듬어진 돌을 7~8단 쌓아 네 벽을 만들었다. 바닥에는 얇게 점토를 깔고 그 위에 얇은 돌을 이용하여 시신 받침대를 놓았다. 대략 석곽묘의 크기는 남·북 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2.4×1.5m 내외이다.   또한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의 적석총 부근에서나 볼 수 있는 수인묘(守人墓) 형태의 횡혈식 고분도 우미내 마을 서편 바위산 정상부(대성사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길 중간 부근)에서 발견된 바 있다. 넓고 편편한 바위 위에 조성되었는데, 길이 240㎝, 폭 80㎝, 높이 90㎝ 가량의 규모를 갖는다. 원래 위에 덮였을 봉토는 지금은 거의 유실되고 남아있지 않다.

    고구려와 관련해서는 이곳 아차산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구의동 유적을 통해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구의동의 유적은 한때 무덤자리로 파악되었던 곳이다. 하지만 유적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출토물의 성격 규명을 통해 서울대 조사팀은 최근 발간한 「한강유역의 고구려 요새(1997년)」에서 고구려의 요새지로 최종 확인한 바 있다.    어쨌거나 이곳 구의동을 포함한 아차산 전역에서 고구려의 유적이 새롭게 발굴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강을 놓고 치열하게 전개되었을 삼국의 쟁패를 오늘에 되살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더욱이 이런 현장은 그냥 스쳐 지났던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재삼 돌이켜보도록 하는 마력을 갖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저 아래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 한강에게로 달려가면 그 날의 역사를 속 시원히 말해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5호선 아차산역(대공원후문역) 하차-2번 출구로 나와 파리바게뜨가 있는 골목길을 따라 10분 정도 올라가면 아차산 공원에 다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