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경북 문경 사불산

레이지 데이지 2010. 7. 14. 22:46

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에 있는
사불산(四佛山,공덕산) 대승사(大乘寺)와 윤필암(潤筆庵)

탐방전경 입니다 

 

삼국시대의 거찰, 고승대덕 배출한 찬란한 역사 간직

공덕산 아래에 자리잡은 대승사.  북면 전두리 사불산(四佛山,912.9m)의 중턱에 자리잡은 삼국시대의 거찰(巨刹)이며 한국 불교사에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찬란한 역사를 지닌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다. 창건의 내력은 신라 진평왕 9년(587)에 진평왕이 사불산 산마루에 있는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 옆에 창건했다. 진평왕은 한 승려<망명비구(亡名比丘)>를 청하여 절을 맡기고 사면석불에 공양을 올리게 했다. 고려 고종때(1213~1259) 상주목사 최자(崔滋)는 이 절의 서남쪽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를 새롭게 단장했으며, 조선 초기에는 득통 기화(得通 己和)가 이 절의 조전(祖殿)에 있으면서 《반야경》을 연구했고, 반야사(般若社)를 결성하여 후학들을 지도했다.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전소한 뒤 선조37년(1604)부터 숙종 27년(1701)까지 법당을 비롯하여 승당, 동상실(東上室), 관음전, 조전, 미륵전, 중실(中室), 시왕전(十王殿), 향로전(香爐殿), 천왕문, 만세루, 침계당(枕溪堂), 금당, 영자전(影子殿), 향적전(香積殿), 응향전(凝香殿), 나한전, 청심전(淸心殿) 등을 신축했다. 이 중 금당은 숙종 18년(1692)에 지었는데, 미면사(米麵寺 ; 白蓮寺) 삼존불을 옮겨 봉안했다. 영조 원년(1725) 의학(義學)이 삼존불상을 개금했는데, 이때 아미타불의 복장(腹藏)에서 사리 1과와 신라 성덕왕 4년(705) 금으로 쓴 《화엄경》7권이 나왔다.
  영조3년(1725) 종각을 단장했고, 1730년 금강문을 지어 금강역사상과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을 모셨으며, 다음해 천왕문, 금강문, 일주문을 단장했다. 당시의 산내 암자로는 미륵암(彌勒庵), 사불암(四佛庵), 상적암(上寂庵), 대비암(大妃庵), 묘적암(妙寂庵), 묘봉암(妙峰庵), 윤필암(潤筆庵), 문수암(文殊庵), 보현암(普賢庵) 등 9개가 있었다. 철종 13년(1862) 명부전과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자 의운(意雲), 취월(就越), 덕산(德山) 등이 중건했다. 고종 9년(1872) 의운이 극락전을 중건했고, 이듬해 누각 밖으로 석축을 쌓고 회랑을 신축했다.
광무 3년(1899) 월파(月波)가 중심이 되어 염불당을 만들고 미타계(彌陀契)를 설치했으며, 환경 우인(幻鏡 雨仁), 화응(華應), 학송(鶴松) 등은 동별당(東別堂 : 祖師堂)에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설치하여 7년  동안 정진했다. 이때 동별당이 좁고 퇴락하여 많은 승려들이 정진할 수 없으므로 1906년 동별당 동쪽에 건물을 짓고 쌍련암 만일회(雙蓮庵 萬日會)를 개설했다.
  1956년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됐고, 1960년 주지 남인 기종(南印 基琮)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부속 암자로는 묘적암, 윤필암, 상적암 등이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극락전, 나한전, 시왕전, 선원, 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목각탱화와 목각탱화 관계문서 일괄(보물 제575호), 금동보살좌상(보물 제991호), 사적비와 아미타불상에서 나온《금자화엄경》7권, 석가모니 사리 1과 등이 있다. 이 중 목각탱화 관계 문서는 1869년과 1876년에 작성되었는데, 조선 후기 이 절과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사정을 비롯하여 이 절에 있는 목각탱화에 얽힌 유래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 목각탱화는 원래 부석사에 있었는데, 부석사가 폐찰인 상태로 있어 이 절로 옮겨왔다. 뒤에 부석사가 탱화 반환을 주장하자 두 절 사이에 시비가 일었는데, 이 문서는 1876년 대승사가 부석사의 조사전 수리 비용을 대주기로 하고 시비를 일단락하게 된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묘적암에는 마애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239호)이 있고 고려시대 작품으로 그 크기는 6m에 이른다.

  사불산의 주봉은 공덕봉(功德峯)으로 산중허리에 사면에 불상이 조각된 사면불암(四面佛岩)이 있다. 일연화상(一然和尙)은 삼국유사에 천강(天降, 하늘에서 내려옴)의 사면불암을 적어 전한다. 붉은 포장에 가리워진 사면불암이 공덕봉의 중복(中腹)에 하강했다. 진평왕은 서북 하늘 밑의 서광의 발원지를 찾아 이곳까지 행차하시어 환희재(歡喜재,재=山+上.下)에서 사면불암의 소재를 확인하시고 크게 기뻐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 고개를 환희재라 부르는데 소야리에서 대승사로 넘는 길목의 고개이다.
  삼국유사의 사불산 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죽령의 동쪽 100리쯤 되는 곳에 높이 솟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 9년에 홀연히 사면방장(四面方丈)의 한 큰 돌에 사방여래(四方如來)를 새기고, 붉은 비단으로 싼 것이 하늘에서 그 산꼭대기에 떨어졌다. 왕이 듣고 거기에 가서 쳐다보고 경건한 예를 갖춘 후 드디어 그 곳에 절을 창건하여 절 이름을 대승사라 하고 연경(蓮經)을 외는 중(이름이 전하지 않음, 亡名)을 청하여 이 절을 맡게 하고 깨끗이 쓸고 돌을 공양하여 향불을 끄지 못하게 하였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 功德山)이라 하고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한다. 중이 죽어서 장사를 지냈더니 그 무덤 위에서 연(蓮)이 났었다.” 1956년에 소실된 집들을 중창하고 사적비(事蹟碑)를 건립했다.

대승사 사찰유물

사찰 유물

유     물     현     황

대승사 목각탱 및 관계문서

폭 3m,높이 4m인 목각으로 된 탱화와 관계문서는 보물 제 575호로 지정 돼 있다. 관계문서는 당초 영주 부석사에 있던 이 대승사 탱화를 대승사로 옮겨 오게 돼 두 사찰에서 소유권 쟁송이 있어 그 결과 사찰 보수비 조로 250냥을 부석사에 변상하기로 합의했다는 문서 4점이다. 추가정보

대승사 금동보살좌상

보물 제991호인 금동보살좌상은 조선 중종 11년(1516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장식이 화려하다. 추가정보

대승사 마애여래좌상

지방유형문화재 제 239호로 대승사에서 묘적암 방향 오른쪽에 위치한 암벽에 음각한 높이 6m, 폭 3.7m로 불교미술의 변천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추가정보

우부도(牛浮屠)

대승사에서 윤필암 가는 산길 아래에 위치.  부도 1기가 세워져 있는데 우리나라 부도 가운데 소를 대상으로 조성된 것은 드문 일로 우부도를 소개하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 절을 처음 지을 때 한 필의 소가 어디서 왔는지 아무리 무거운 짐을 실어 날라도 지치지 않았으며, 사람이 이끌지 않아도 스스로 오고 가고 했다.  사찰 건립을 끝내고 이 소는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 일을 이상히 여겨 기념하고자 부도를 조성해 줬는데 우부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추가정보

유무유(有無有)바위(나도여래바위)

대승사에서 윤필암 가는 산길에 위치해 있다.

보현암(普賢庵)

대승사 큰절 동편 100m 지점의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초창의 연대는 1930년대이나 확실치는 않다. 오희(五喜) 이사(尼師)의 일문(一門,문중)이 거처했었다.

대승사 석탑

높이 2.42m로 1층 탑신에 감실을 팠으며 상륜부는 전실되었고 각층 옥개석은 파손이 심하다. 조성 당시에는 정교한 일품이었으나 장구한 세월동안 손상됨이 심하다. 추가정보

 

부처님 모시지 않는 사불전, 법당서 사면불암 참배

  승사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윤필암 안내판이 서 있는 삼거리윤필암.에서 500m쯤 포장길을 올라가면 웅장한 암벽을 배경으로 윤필암이 위치하고 있다. 1380년(고려 우왕 6) 각관(覺寬) 비구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이래 참선도량으로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1885년 고종의 명으로 창명(滄溟)이 중건하였으며 1980년대 초에 모든 건물을 새롭게 지어 현재는 비구니들의 수도도량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특히 법당인 사불전(四佛殿)에는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그 자리에는 벽면을 유리로 설치하여 법당안에서 사불암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았으니 사불암까지 가지 않고도 사면불상에 참배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리라. 유형문화재인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및 지감과 문화재자료인 후불탱화를 소장하고 있다.

대승사 윤필암 사찰유물

사찰 유물

유     물     현     황

사불암(四佛岩)

윤필암의 사불전에서 정면에 보이는 높은 곳에 있으며,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 사불암은 높이 2m, 각면이 1.5m 정도인 사면체 바위인데 사면에 부처님 모습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오랜 세월에 마모되어 형체만 희미하게 남아 있으나 능선위의 큰 바위 위에 터를 잡고 있는 모습이 장엄하다. 추가정보

대승사 윤필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지감

윤필암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지감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300호로 지정돼 있다. 이 불상은 사중(寺中) 전언(傳言)으로는 1950년대 중반 문화재 절취범에 의하여 밤중에 도난당하였으나 현몽하여 “절은 지키지 않고 잠만 자느냐”는 질책에 여러 스님들이 깨어나 살펴보니 불상이 도난되었는데 절취범은 멀리 도망치지 못하고 담장밖에 밤새 헉헉거리고 있으므로 이를 붙잡아 불상을 도로 찾았다는 일화가 있다. 추가정보

문경 대승사 윤필암 윤필암 후불탱화

윤필암에 있는 이 후불탱화는 문화재자료 제348호로 지정돼 있다. 이 탱화는 본래 윤필암 선실(禪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후불탱화로 짐작된다. 중앙에 아미타불과 좌우에 관음·대세지·지장·미륵 등 8대 보살이 시립(侍立)하고, 좌우에 각각 5구씩 10대 제자가 등장하고 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조성 후 상당기간 동안 후불탱화가 없었는데 1830년에 탱화를 조성하여 봉안한 것으로 짐작되며, 탱화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추가정보

대승사 윤필암 삼층석탑

윤필암 사불선원(四佛禪院) 뜰앞 삼층석탑 사불전(四佛殿)후록 3층석탑 추가정보

대승사 윤필암 부도

우부도를 지나 윤필암으로 오르는 노변에 세워진 소형 석종형부도이다. 크기가 작기 때문에 애기부도라는 애칭을 가졌다. 고려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추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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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사인 나옹화상이 득도한 곳, 나옹화상 진영 간직

묘적암.  사 큰절에서 서북쪽 1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해발 고도가 높고 전망이 트여 시계가 넓다. 신라 선덕여왕15년 (646)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했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복위 8년(1339) 나옹 혜근(懶翁 惠勤)이 이 절에 출가하여 수행했다. 혜근이 처음 이 절의 요연(了然)을 찾아 출가를 청했을 때, 요연은 ‘여기 온 것이 무슨 물건이냐?’라고 물었다. 혜근이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습니다만, 보려 하여도 볼 수가 없고 찾으려 하여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뒤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를 물었다. 요연은 자신도 알지 못하니 다른 큰스님을 찾아가서 물어 볼 것을 권했다. 뒷날 혜근이 도를 깨닫고 다시 이 절로 돌아와서 회목 42그루를 심었으며, 그 뒤 혜근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 절로 찾아왔다. 그리하여 이 절은 조선 후기까지 불교의 한 성지처럼 부각되었다.
  현종 9년(1668) 성일(性日)이 중건했고, 1900년 취원(就園)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법당과 요사채가 있다. 부근에는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유적이 여러 곳에 있다. 나옹화상은 이곳에서 득도했으며 사미[沙彌,불문에 처음 들어가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수행하는 남자 승려. 사미승]시절의 일화가 많이 남아 전한다.
순조 3년(1803)에 조성된「공민왕사 나옹화상진영」과 조성년대가 알려지지 않은「동봉대화상진영」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묘적암 입구 산기슭에는 나옹화상과 동봉화상의 부도(浮屠)가 서 있고 나옹화상의 부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화상의 발우(鉢盂)가 부도속에 간직돼 있으며, 밑면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어 닿으면 소리가 난다” 그 외에도 묘적암에는 심자암(心字庵), 안암(鞍岩), 좌선암(坐禪岩), 나옹화상 행적을 기록한 목가판(1862년 조성) 등 나옹화상의 유지(遺址)들이 많이 남아있다.

대승사 묘적암 사찰유물

사찰 유물

유     물     현     황

대승사 묘적암 나옹·동봉당 부도

묘적암 2기의 석종형부도로서 왕사 나옹화상(王師 懶翁和尙)과 동봉당화상(東峰堂和尙)의 부도이다. 나옹화상(1320~1376)은 공민왕의 왕사이며, 대승사 묘적암에서 삭발 입산했다. 추가정보

공민왕사 나옹화상진영

공민왕사인 나옹화상의 진영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추가정보

동봉대화상진영

동봉 대화상의 진영이 나옹화상 진영과 함께 보관돼 오고 있다.  추가정보

 

사불암이 붉은 보자기에 내려 왕이 직접 친견한 기록

개산조 대승사 망명비구비  산 대승사의 내력을 적어놓은 사적비(四佛山 大乘寺 事蹟碑)는 다음과 같다.사불산은 본시 공덕산인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9년 정미(587)에 사면에 불상이 조각된 일좌방장암(一座方丈岩)이 홍사(紅紗)에 싸여 천상으로부터 공덕산 중복(中腹)에 내려 왔다는 소문이 궁중까지 전하여 왕께서 친히 공덕산에 행행(幸行,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둥하는 것)하시니 과연 사불암이 있는지라, 왕께서 대희(大喜,크게 기쁘함)하사 신심(信心,옳다고 믿는 마음)을 발하여 예배를 무수히 하시고, 암하(岩下,바위 아래)에 절을 건립케 하시고 도승(道僧,도를 깨친 승려)인 망명비구(亡名比丘,이름을 알 수 없는 남자 승려)를 주석(住錫,살도록 함)케 하니 이것이 곧 대승사이다. 이로 인하여 산명(山名,대승사가 있는 산 이름)은 사불산(四佛山)으로, 사명(寺名,절 이름)은 대승사(大乘寺)라 칭하게 되었다. 연(然,그러나)이나 기지(基址,터)가 협소하여 망명비구는 현 사지(寺址,절 터)에 대가람(큰 절)을 창건하고 대중과 같이 수행하시다가 입적(入寂,승려가 죽음,열반)하시다. 망명비구는 상주출생으로 본명이 망명이 아니라 익명(匿名,이름을 숨김)하고 무명승(無名僧,이름이 없는 승려)으로 상주지방의 소사(小寺,작은 절)에서 음양술수(陰陽術數,역학에서 길흉을 점치는 것)로서 인간의 화복(禍福,재앙과 복)이나 점치고 겨우 의식(衣食,옷가지와 먹을 것)으로 연명하는 술승(術僧,재주를 부리는 승려)으로만 지목받고 수도승(修道僧,도를 닦는 승려)으로서는 보지 아니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주내(州內,상주고을) 신도가정에서 선망부모(先亡父母,부모가 먼저 돌아가심)를 위하여 설제(設齊,베푸는 의식)하고, 여러 고승을 청하여 법요를 행할시 망명비구도 말석에 참예케 되어 야심토록 독경하고 파제(罷齊,의식을 마치고) 후 소등취침 하려던 중 별안간 괴광(怪光,이상한 빛)이 발사하므로 실화로 생각하고 현장을 가보니 망명비구의 구중(口中,입 속)에서 서상(瑞相,상서로운 조짐)이 발하는 이유를 물으니 답왈(答曰,답하기를) 내가 승수(僧數)에 참여하고 있으나 떳떳한 정행(淨行,깨끗하게 마음을 닦는 일)을 닦지 못하고 술수(術數)로서 자신지책을 삼는 것이 부끄러워 남 모르게 법화경을 지송(持誦,가지고 다니면서 외움)하고 도업(道業,수행하는 일)을 자조(資助)하는 밀행(密行,몰래 행함)을 계속한 소치인가 하므로 비로소 그의 이름이 원근에 전하여 승속(僧俗,승려와 속인)이 흠귀(欽歸,공경하여 돌아옴)하였다. 그런데 천강사불(天降四佛,하늘에서 내려온 사면에 부처를 새긴 바위)의 기적으로 인하여 왕께서 대승사를 창건케 하고 망명비구가 입적(入寂)한 후 사하동구내(寺下洞口內,절 아래 마을 입구)에 매장한 총상(塚上,무덤 위)에서 쌍련(雙蓮,두 송이의 연꽃)이 용출(湧出,솟아 오름)하였으므로 현재까지 천강사불(天降四佛,하늘에서 사불이 내려오고)하고 지용쌍련(地湧雙蓮,땅에서 두 송이의 연꽃이 솟아나옴)이라는 높은 도예(道譽,도를 기림)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고전에 의하면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공덕산하(功德山下,공덕산 아래)에 미면사(米麵寺)를 창건하고 원효대사(元曉大師)는 인근 10리허(許)인 화장사(華藏寺)에 계시면서 조석으로 상봉하였다 한다.
  사지(寺誌,절의 내력을 기록한 책)에 의하면 차사(此寺,이 절) 초창(初創,처음 창건) 후 순치 무술(1648)에 의현사(儀玄師)가 중수하고 아미타불과 관음지장을 좌우보처로 모셨고, 순치 신묘(1651)에는 경묵사(敬默師)가 중수하고 만력 갑진(1664)에는 서총사(瑞聰師)가, 강희 기사(1689)에는 종수사(宗秀師)가, 강희에는 승열사(承悅師)가, 순치 신묘(1651)에는 성훈사(省燻師)가, 강희 신사(1701)에는 연립사(衍笠師)가, 숭정 경오(1630)에는 계담사(桂淡師)가, 강희 정미(1667)에는 선림사(先林師)가, 순치 병술(1646)에는 각인사(覺仁師)가, 강희 계미(1679)에는 원응사(圓應師)가, 강희 을사(1689)에는 혜항사(惠恒師)가 각각 중수하였고, 그 외에도 제사중수(諸師重修,모든 師가 절을 크게 보수)함에 힘을 써서 대웅전, 응진전, 관음전, 십왕전, 금당, 요사, 종각, 일주문, 누각, 수각, 부고, 문랑 등 전각이 사불산 일동에 미만하여 교남(嶠南)의 대가람이 되었다.

  그리고 산내에는 구암(九庵,아홉 암자)이 있었으니 상적암(上寂庵), 대비암(大妃庵), 묘적암(妙寂庵), 윤필암(潤筆庵), 보현암(普賢庵), 문수암(文殊庵), 반야암(般若庵), 사불암(四佛庵), 미륵암(彌勒庵) 등인데, 현재에는 묘적암, 윤필암, 보현암만 남아 있다. 묘적암(妙寂庵)은 신라 선덕여왕 15년 정미(646,丙午의 잘못임)에 부설거사(浮雪居士)의 초창인 바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출가 득도지처(得道之處,도를 얻은 곳)이다. 화상의 속성(俗姓,속세의 성)은 아씨(牙氏)이고 영해인(寧海人)이다. 화상이 생후 20년 기묘(1339)에 우인(友人,친구)의 사망을 보고 인생의 무상을 느껴 공덕산 묘적암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삭발위승(削髮爲僧,머리를 깎고 중이 됨)을 청하니 선사가 묻기를 “네가 무슨 일로 僧이 되고자 하느냐?” 함에 답왈, “능히 말하고 능히 듣는 자가 왔나이다. 그러나 수도해탈의 길을 모르겠나이다.”하니 사(師,스승)가 “아역부지(我亦不知,나 역시 알지 못함)이니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 가라.”하시고 삭발수계만 해주었으므로 至正14년(4년의 오기) 갑신(1344)에 회암사(檜岩寺)로 가서 석옹화상(石翁和尙)과 4년간의 향연(香緣,향기로운 인연)을 맺고 곽철대오(廓徹大悟,둘레를 뚫어 크게 깨달음)하여 그 후 중국 대도(大都,큰 도시) 법원사(法源寺)로 가서 서천(西天) 지공화상(指空和尙)과 평산(平山) 처림선사(處林禪師)에게 인가를 받고 귀국하여 고려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신 분이다.
  그 후 다시 묘적암에 오셔서 기념식수로 회목(檜木,노송나무 또는 편백이라고도 하며 측백나무과) 4주를 심었는데, 현재 노목으로 남아 화상을 추모케 하고 있다. 그리고 반야암(般若岩)에는 이태조의 왕사인 무학대사의 제자 함허득통선사가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찬술(撰述,지음)하시었다고 전한다. 선사가 읊은 시에는 반야봉두월(般若峯頭月,반야봉 위의 달)이요, 대승전각풍(大乘殿閣風,대승사 절집에 이는 바람)이라는 시귀가 있다.
  윤필암(潤筆庵)은 고려 우왕 6년(1380)에 각관비구(覺寬比丘)가 초창하여 현재까지 선도장(禪道場,참선을 하는 도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며, 그 후 옹정 계축(1723)에 능파화상(凌波和尙)이 쓴 사적기에 보면 옹정 을사(1725)에 의학사(義學師)가 당사(堂寺,절집)에 모신 삼존상을 보수하던 중 미타상(彌陀像)의 복장(腹藏)에서 금합(金盒)에 사리 1과와 금자화엄경(金字華嚴經)이 나왔다고 하였다. 불상조성 연기(緣起,동기)에 신룡(神龍) 원년 을사(705)라고 하였으니 신룡은 당의 중종 연호인즉 신라 진평왕 후 70여년이라 현재 당사(當寺,대승사)에 봉안된 사리가 이 때의 것이 아닌가 한다.
  그 후 익종 신유(1831, 순조 31)에 구담화상(九潭和尙)이 법형(法兄,한 스승에게서 법을 같이 배운 사람을 높이어 이르는 말) 만송(滿松)과 같이 고운사(孤雲寺)에서 차사(此寺,이 절)로 오자 철종 임술년(1862) 화재로 사우(寺宇,절집)가 전소(全燒,모두 타서 없어짐)한지라, 본사 대덕(大德,크게 덕을 쌓은), 의운.취월.덕산 삼화상이 화연(化緣)을 모아 창건케 하였다. 고종 을해(1875)에 목각 후탱을 부석사로부터 이안(移安,옮겨와 안치)하였으며, 대한 광무 기해(1899)에 현종.월파 양 화상이 염불당을 창건하기 위하여 건립기금으로서 계를 모아 을사(1905) 정월에 유종.학송.화응의 제사(諸師)와  같이 쌍연암의 정건(定建)을 보게 되었다.
  거금(距今,지금으로부터) 23년전 병신년(1956)에 실화로 극락전, 명부전, 산신각을 제외한 대소건물이 전소된 것을 그 후 남인. 설월. 의현 삼화상이 화연을 모아 응진전 요사는 경자년(1960)에 , 대웅전, 선실, 일주문은 무신년(1968)에 중건하고 을묘년(1975)에 설월사(雪月師)가 일주문을 현재 위치에 이건하고 기타 부속건물을 신건(新建,새로 지음), 불상 4위의 개금(改金), 5백나한의 개분불사를 하고 무오년(1978)에 김천.대구 양지(兩地) 신도들의 원력으로 전기불사까지 완성하게 되어 심산유곡에도 현대문명의 혜택을 보며 생활하게 되었다. 상기와 같이 사적과 업적을 영원토록 보존하기 위하여 삼가 비명을 찬술하나이다. 불기 2522년 12월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