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 靜 ...우두커니, 멀거니/낯설게 하기

사카모토 료마

레이지 데이지 2011. 7. 13. 11:03

 

료마는 오다 노부나가, 도구가와 이에 야스와 더불어 일본의 3대 영웅중 하나라고 한다.,

료마의 포인트는  "혁명을 위해 던진 열정"과 멸사봉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료마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메이지 유신의 시대적인 배경을 이해해야 하는데

 

 

 

 

 

 

사카모토 료마의 삶은 어찌 보면 고난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함선을 이끌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고 싶다는 꿈은 번번이 좌절을 겪게 되고,    전쟁이 아닌 화해와 양보로써 정권을 교체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자객의 칼을 맞아 죽게 된다.
그런 그의 삶에 현대의 일본인들은 열광한다.                                                                    그야말로 젊은 패기와 정의감밖에 없었던 그가 원대한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죽기 직전까지 내달렸던 그의 정열적인 삶에 반한 것은 아닐까.                                            사카모토 료마의 역동적인 삶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 타성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가슴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 <사카모토 료마 평전> 중에

 

 

 사카모토는 음력 1835년 11월 15일, 시코쿠의 도사 번(오늘날의 고치 현) 고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카모토 하치헤이 나오타리"(坂本八平直足)는 하급무사인 고시(鄕士)계급이었다.

1853년 에도로 유학하여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 지바 도장에서 검술을 배우면서,

한편 에도의 존왕양이론자들과 사귀었다. 그 해 페리 제독이 내항했고,

무사계급에서는 서양 세력에 대해 개항하려는 막부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같은해 말 사쿠마 쇼잔의 사숙에서 공부했고,

 1854년 고향으로 돌아가 유학자이자 화가인 가와다 쇼료로부터 서양에 대해 배웠다.

 

<탈번>

가쓰 가이슈사카모토는 1861년 다케치 즈이잔(武市瑞山)이 주도한

도사근왕당(土佐勤王黨: 도사출신의 하급무사들이 천황을 지키고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자 모인 모임)에 참여했다.

1862년 도사근왕당은 번의 중신 요시다 도요(吉田東洋)를 암살하며,

사카모토는 탈번하여 낭인(浪人: 소속이 없는 사무라이)으로서 에도로 향했다. 당시 탈번은 사형에 처해지는 중죄였다.

 

그 해 개화파 막부 관리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죽이려다 오히려 설복돼 그의 제자가 된다.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가쓰 가이슈는 료마에게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소개해줬다.

가쓰로부터 서양 문물을 배운 사카모토는 양이에서 개화로 생각이 크게 바뀌며,

번이라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 일본국으로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듬해 가쓰를 도와 고베 해군훈련소 설립에 힘썼다. 이후 가쓰가 물러나고 훈련소가 문을 닫자,

사카모토는 무역회사 가이엔타이(海援隊)를 세웠다. 가이엔타이는 이후 도막파에 군수 보급을 하기도 했다.

 

도막의 중심은 사쓰마 번(가고시마 현)과 조슈 번(야마구치 현)이었다.

사카모토는 동향인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사이가 나쁜 두 번을 중재하여,

1866년 삿초 동맹(사쓰마와 조슈 동맹)을 결성하는 데 공헌했다.

 

[죽음 ]

대정봉환 그림1867년 교토로 가는 배에서 사카모토는 대정봉환 등의 구상을 담은 선중팔책을 입안했다.

대정봉환의 구상은 사카모토가 속했던 도사 번의 번주인 야마우치 도요시게(山內豊信)가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에게 건의하여 채택되었다.

이후 천황이 이를 받아들여 실제로 대정봉환이 이뤄졌고, 정권은 막부에서 천황 중심의 조정으로 평화적으로 넘어갔다.

대정봉환 한달 후 사카모토는 나카오카와 함께 교토에 머물다가 음력 11월 15일인 여관 오미야에서 습격을 받고 피살됐다.

(오미야 사건)누구의 소행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막부측 미마와리구미의 소행이라는 설이 유력한 가운데, 신센구미, 아군인 사쓰마의 소행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사카모토는 머리에 상처를 입었고 천천히 죽어갔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당시 같이 습격당했던 나카오카가 중태인 가운데서도 3일간 생존했기 때문에

그에 의해 소상히 전해 질 수 있었다. 유족으로 부인 오료와 누나 오토메 등이 있었다.

 

미마와리구미 소행설은 근거 자료가 있다.

보신 전쟁이 끝나고 체포된 전 미마와리구미의 대원 이마이 노부오가

사카모토 료마 암살은 자신들에 의한 것이라고 증언하며 당시의 세세한 정보를 모두 말한 것이

교부쇼(강무소) 공술서에 기록이 돼있다. 아직까지도 이를 뒤집을 만한 사료는 나오지 않고 있다.

 

신센구미의 소행이라는 설은 다음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건 발생 7일전(3일전이라고도 한다),

전 신센구미의 참모이자 능위사인 이토 가시타로가 사카모토에게 찾아갔다.

그가 말하길, "나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

지금 신센구미가 당신을 노리고 있으니 모쪼록 조심하라"라고 했는데,

당시 사카모토는 신센구미를 배신해 사쓰마 번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이토를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고,

그의 충고도 흘려들었다.

게다가 실제로 사건이 발생한 날, 현장에서 칼집과 나막신이 발견됐는데,

이때 기다렸다는듯이 달려온 이토가 "이 칼집은 10번대 하라다 대장의 것인 듯하다"라고 증언했고,

그 나막신 역시 신센구미가 자주 드나드는 후쿠베 정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 증언을 한 3일 뒤, 11월 18일에 이토 일행은 아부라코지에서 신센구미에 의해 암살됐다.

이 일련의 사건이 신센구미의 사카모토 료마 암살설을 더욱 굳혔던 것이다.

하지만 암살을 하러가는 자객이 쿵쿵 소리나고 움직이기도 어려운 나막신을 신는다는 것은 이상하다.

또 사카모토 료마를 암살했다는 것은

당시로선 엄청나게 자랑하고 떠들고 다닐 일이었지 숨길 일은 아니었으므로

신센구미 측이 당시 극구 부정한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관련 서적]

료마가 간다 - 시바 료타로 지음, 이길진 옮김, 창해 간. 전 10권.

사카모토는 종래 크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1962년부터 신문에 연재된 시바 료타로의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유명해졌다. 여기서 그는 난세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미래를 내다보고 실행하는 풍운아로 그려진다.

오이 료마(お〜い龍馬) - 장편 만화

사카모토 료마 -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이길진 옮김, 솔출판사 간. 전 3권.

근대일본의 사상가들 - 가노 마사나오 지음, 이애숙 외 옮김, 삼천리 간.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

<항우와 유방>, <세키가하라 전투> 등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시바 료타료의 대표작.

메이지 유신 때의 혁명가 사카모토 료마의 일대기를, 철저한 고증과 풍부한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그려냈다.

메이지 유신기는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바쿠후가 메이지 정부에 정권을 넘기기 직전인

1853년에서 1867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이때, 일본의 신분 구조는 최고 통치자인 쇼군을 정점으로

녹봉 1만 석 이상의 한슈인 다이묘와 한슈에 속한 무사, 농민, 기술자, 상인의 순서로 서열이 매겨졌다.

무사는 다시 상급 부사와 하급 무사로 나눠지는데, 이러한 신분 구조는 일상생활에까지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이러한 1835년,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멍청이'라 불릴 정도로 바보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열아홉에 에도로 올라온 후부터 본격적으로 검술 수업을 쌓았고, 일본 최고 검술의 달인이 된다.

그는 미토 양이론자와 교류를 쌓으며 근대화에 눈을 돌리고, 바쿠후 타도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이 책은 1962년부터 4년간 '산케이 신문'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출간 이후 현재까지 1억 부 이상 팔려나갔다.

우리 나라에서도 1992년 <제국의 아침>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적이 있는데,

이번에 새로이 번역하고 편집을 다듬었다.

  대다수의 일본인들 사이에서 잊혀져 있던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을

역사의 주무대로 이끌어낸 최대 공헌자는 얼마 전 작고한 작가 시바 료타로이다.

그가 1962년 6월부터 3년 간 산케이 신문에 연재한 장편소설

<료마가 간다>는 순식간에 밀리언셀러가 되었고 현재까지 130판 이상 1억 부 이상이 팔리면서

현대 일본인들 사이에 이른바 '료마 전설'이 정착되었다. - 조선일보

 

최근 일본 아사히 신문이 발표한 '지난 1천 년 일본의 정치 지도자' 독자 인기투표 결과 사카모토 료마가 1위를 기록했다.

1966년 인기작가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가 큰 인기를 끌면서부터

사카모토 료마는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이 소설에서 료마는 대담한 꿈, 추진력과 유머감각을 함께 갖춘 이상주의자로 묘사됐다.

이 소설을 읽고 자란 세대는 오늘날 일본사회의 척추를 이루고 있다.

 

 

'虛 靜 ...우두커니, 멀거니 > 낯설게 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롤랑 바르트  (0) 2011.07.23
책-미학 오디세이3  (0) 2011.07.22
오마주[hommage]의 위키백과적 해석  (0) 2011.06.16
프로이드  (0) 2011.06.16
무라카미 하루키 - 구토 -  (0) 2011.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