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미술 [中國美術]
중국에서는 예술을 애호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제작하는 것이 지배계급의 기본적인 교양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서(書)를 시문(詩文)과 더불어 으뜸으로 여겼으며, 회화는 서를 보완하는 구상성(具象性)과 도덕교육에 보탬이 되는 실용성으로 중당(中唐) 무렵부터 서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었으나, 청조(淸朝)에 이르기까지 소기(小技) ·말예(末藝)로 보는 인식에는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조각이나 공예 등 지식인이 직접 제작에 종사하지 않는 장르에서는, 직인(職人) ·공장(工匠)의 산물이라 하여 서화(書畵)와 동렬로 보지 않았고, 장인예술(匠人藝術)을 천시하였다. 표현형식은 구상(具象)을 벗어나지 않으며, 결코 기하학적 문양이나 추상적 조형에 흐르지 않았다. 피[血] ·나체 ·데포르메 등 비일상적 소재를 배제하고, 단정 ·명결 ·솔직하고 논리적 ·사실적인 표현을 정통으로 하며, 숭고 ·풍만 등 정신의 충실을 제일의(第一義)로 하였다. 또 비애 ·통곡 등 격정의 표출을 이단으로 보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역대 왕조(王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중국미술의 본질이며, 이민족의 침입에 의한 지배하에서도 변화나 동요가 없었다.
중국의 회화
중국에서 어느 때부터 회화가 그려지게 되었는가를 알아보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현재 발견된 유물에서 본다면, 창사[長沙]고분에서 출토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비단에 그려진 무녀도(巫女圖)를 최고(最古)의 것으로 보며, 이는 BC 400년부터 BC 2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한다. 전한(前漢)시대에 들어서면서, 묘실의 벽돌에 새긴 인물이나 동물 ·귀신의 흔적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선묘(線描)로서 회화적 요소가 짙은 것이다. 후한(後漢)이 되면서, 무량사(武梁祠) 분묘의 석실에 있는 화상석(畵像石)이 회화로서 한층 발전하였고 신화 전설을 주제로 한 그 유품은 조형적인 박력을 갖추었다. 회화뿐만 아니라 다른 미술 분야에서도 한대(漢代)는 중국미술의 원형이 형성된 시대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전문적 직업으로서 화공이 나타나고, 육조(六朝)시대가 되면서 지식인의 교양의 하나로서 회화가 유행하며, 그 화풍 등이 쟁론(爭論)되기에 이른다.
한대의 분묘 석실의 전각도(塼刻圖)는 벽화의 소박한 형태를 이루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나, 불교가 성행하자 이것이 다시 석굴사원의 벽화로 되어 수(隋) ·당(唐) 시대로 계승된다.
당대(唐代)에는 뛰어난 화가가 많이 나타나며, 초기에는 염립본(閻立本)과 위지을승(尉遲乙僧) 등이 있고, 중기에는 오도현(吳道玄)이 있으며, 주된 사원의 벽화는 모두 그의 손으로 된 것이라 하며, 후세에까지 동양화의 상징이라 일컬어진다.
이 밖에 말그림의 명수 한간(韓幹), 시인이며 또한 산수화에 능한 왕유(王維) 및 이사훈(李思訓)이 있다. 송대(宋代)에는 역대의 천자가 화원(畵院)을 설치하여 회화의 제작 ·감상 ·수집이 성행하였다. 전대로부터 계승된 사실주의를 더욱 추구하려는 경향이 화원을 지배하고, 이것을 원체화(院體畵)라 불렀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원체화의 권위주의에 반항하여 사실보다도 정신의 고양을 이상으로 하는 재야(在野)의 활동도 활발하였고, 전자는 전문화가, 후자는 문인화가라 일컫는 지식인의 여기(餘技)로서 행하여져서 송대 회화는 크게 둘로 나뉜다.
원체화는 북송(北宋)의 곽희(郭熙), 남송(南宋)의 이당(李唐) ·마원(馬遠) ·하규(夏珪) 등이 산수화에 능하였고, 양해(梁楷)는 산수 ·인물에 뛰어났으며, 화조화(花鳥畵)에는 이안충(李安忠) ·이적(李迪)이 유명하다.
문인화(文人畵)에서는 북송의 동원(董源) ·거연(巨然) ·이공린(李公麟) ·미불(米芾) 등이 대표적인 화가이다. 수묵화(水墨畵)는 당대에 이미 그려졌는데, 남송의 문인 ·승려들 사이에 성행하였으며, 특히 선종(禪宗)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원말(元末)의 사대가(四大家) 황공망(黃公望) ·오진(吳鎭) ·예찬(倪讚) ·왕몽(王蒙)은 먹에 오채(五彩)를 더한 것 같은 정취를 나타냈다 한다.
이러한 부드러운 필치를 자유롭게 구사한 그림을 남종화(南宗畵)라 하고, 원체화의 흐름을 가지는 대상을 정확히 묘사하는 딱딱한 느낌의 그림을 북종화(北宗畵)라 일컫는다. 원대(元代)에 해체된 화원은 명대(明代)에 부활하여 화조화에서는 여기(呂紀), 산수화에서는 대진(戴進)을 시조로 하는 절파(浙派)가 화계의 주류를 이룬다. 이 밖에 명대의 대표적 화가에는 인물화의 구영(仇英), 남종화 융성의 중심을 이룬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동기창(董其昌)이 있다.
청대(淸代)에는 남종화가 주류를 차지하고 왕시민(王時敏) ·왕감(王鑑) ·왕휘(王翬) ·왕원기(王原祁) ·오역(吳歷) ·운수평(煇壽平) 등 사왕오운(四王吳煇)을 비롯하여, 도제(道濟:石濤) ·팔대산인(八大山人) 등 개성이 강한 화가가 활약하였다.
청대 중기에는 양주팔괴(揚州八怪)라 일컬어지는 문인화가가 배출되어, 아무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서로 자유로운 입장을 취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 전통을 근대에 이어받은 자오지첸[趙之謙] ·우창숴[吳昌碩] 등은 근대화가로서 중국 회화사에 이채로운 존재이다.
중국의 조각
중국은 옛날부터 서예나 회화는 미술로 보았으나 조각은 미술로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인이 자국의 조각에 대한 미술적 가치를 인식하게 된 것은 근대에 서유럽인이 불상조각에 주목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불상 이전에도 중국에는 높은 예술성을 갖춘 조각이 있었다. 은(殷) ·주(周)의 청동기에 새긴 동물, 또 동기(銅器) 자체도 조각적인 요소를 갖추었다.
양사오[仰韶] 채도문화(彩陶文化)에 인면사신(人面蛇身)이나 누에의 석조(石彫)가 있으나 중국인의 조소 감각은 은 ·주의 청동기 조형, 정(鼎) ·력(鬲) ·고(觚) ·이(彛) 등의 제기(祭器)와 장식의장에서 발휘되었다. 춘추 전국시대에 명기(明器:장사지낼 때 부장한 기물)의 흑도용(黑陶俑:허수아비)이나 창사[長沙] 전국묘(戰國墓)의 목우(木隅) ·은제호인상(銀製胡人像) 등 인물조형에 대한 흥미가 생겨, 한대의 사실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중국 조각의 발생을 살펴볼 때 공예적이기는 하나 청동기조형에서 볼 수 있는 밀도 높은 조각성은 공예품의 수준은 한 차원 높이 올려놓았다. 그 좋은 예가 흑도(黑陶)이다. 중국의 고대조각은 흑도에 집약되고, 흑도를 출발점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환조(丸彫)뿐만 아니라 부조(浮彫)도 병행해서 뛰어난 것이 만들어졌다.
한대가 되면서 분묘 석실의 벽면에 새긴 화상석은 비교적 저부조(低浮彫)이지만 똑같은 장식에 쓰인 영수(靈獸) 및 사신상(四神像) 등에는 고부조(高浮彫)의 뛰어난 것이 있으며 제재를 자유로이 구사하고 있다.
명기는 한대 이후 그 풍습이 매우 성행하여 당대에는 최전성기였다. 명기는 질그릇이지만, 조각의 일종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특히 인물 ·말 ·가옥 ·가축 등에 뛰어난 것이 많고, 성당기(盛唐期)의 여성상이나 말 등은 유명하다. 그러나 중국의 조각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조각 유산을 가진 민족으로서 그 이름을 높인 것은 불상조각이다.
남북조(南北朝:439∼589)시대부터 당대(唐代:618∼907)에 걸쳐서 만들어진 석굴사원의 불상조각은, 그 엄청난 수와 거대함에 설사 위정자의 정치적 야심의 발현이라 할지라도 민족 에너지의 줄기찬 연소를 말하는 것이다. 둔황[敦煌] ·윈강[雲崗] ·룽먼[龍門] ·마이지산[麥積山] ·톈룽산[天龍山] ·샹탕산[響堂山]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며, 그 가운데서도 윈강 ·룽먼은 조각이 가지는 기념비적인 성격을 실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인 사업으로서의 조불(造佛)만이 아니라, 위진시대(魏晉時代)부터 민간에서도 사자(死者)를 추복(追福)하는 작은 금동불이 비교적 많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불상조각은 서방의 간다라 양식의 조상(彫像)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며, 인도조각의 흐름을 섭취하면서 점점 중국의 독특한 양식을 완성시켰다. 당말 오대(五代)를 거쳐 송대에 들어서면 조각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페이라이펑[飛來峰] ·옌샤둥[煙霞洞] ·마이지산 석굴을 남기지만, 그 이후는 보잘것 없고, 조형활동은 공예 ·회화에 밀려났다.
중국의 공예
중국의 공예는 금공(金工)·도자기·칠공(漆工)·염직(染織) 등 각 분야에 걸쳐서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금속공예>
은 ·주시대의 동기(銅器)가 크게 발달하였고, 그것들은 제사(祭祀)에 사용한 기구로서 갖가지 형태를 나타내고, 그 표면에 새긴 문양은 고도한 주조기술에 힘입어 세계 다른 지역의 청동기를 훨씬 능가하는 뛰어난 것이다. 전국시대부터 한대 및 육조 ·당대에 걸쳐 만들어진 동경(銅鏡) 뒷면에서 볼 수 있는 금은 또는 청패(靑貝)를 상감한 장식경은 그 문양의 형식 ·종류가 다양하고, 특히 당대에 성행한 해수포도경(海獸葡萄鏡)은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이다.
<도자기>
중국의 도자기는 선사시대에 이미 우수한 회도(灰陶) ·채도(彩陶) ·흑도(黑陶)가 만들어졌다. 은대(殷代)에는 동기뿐만 아니라 유약(釉藥)을 쓴 도기가 만들어졌다. 한대에는 청자(靑瓷)가 일부 지방에서 만들어져, 1,250∼1,300 ℃의 온도에서 구워내는 경도(硬陶)의 기원은 세계에서 중국이 가장 오래이며, 당대에는 웨저우요[越州窯]의 청자, 싱저우요[邢州窯]의 백자(白瓷)가 유명하고, 주로 부장품(副葬品)으로 쓰인 당삼채(唐三彩)는 백 ·황 ·녹의 삼채유(三彩釉)를 사용한 것이다.
송대에 들어서면서 중국 도자기는 황금시대를 맞아, 양적으로 증대하고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것이 만들어졌다. 상아와 같은 바탕에 백자를 구운 정요(定窯:河北省 曲陽), 예조(銳彫)의 문양에 유약을 칠한 백자를 구운 여요(汝窯:越州)는 다같이 북송을 대표하는 명요이다. 특히 웨저우요에서는 아름다운 녹색의 투명한 유약이 바탕을 이루고, 그 아래에 음각(陰刻)의 문양이 있는 훌륭한 청자가 만들어져서 비색청자(翡色靑瓷)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당말 ·오대(唐末五代)의 이러한 경향은 송대에 더욱 활발해져서, 전국에 많은 도요가 생기고 각각 특색 있는 아름다운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이 밖에 하늘색[翡色] 유약에 홍반(紅斑) ·자반(紫斑)이 있는 아름다운 도자기를 산출한 소위 균요(均窯), 색채가 풍부하고 생명력 있는 수무요(修武窯)의 도자기, 그리고 중국 최대의 도요지로서 세계에 알려진 징더전요[景德鎭窯]에서 만들어진 잉칭[影靑:靑白瓷]이라는 자기, 이것은 순백의 바탕에 엷은 비색의 유약을 띠운 명품이다. 남송(南宋)의 수내사요(修內司窯)와 교단요(郊壇窯)는 청자를 굽던 관요(官窯)이며, 룽쥐안요[龍泉窯]는 중국 최대의 청자 산지이다. 지저우요[吉州窯]에서는 대피잔이라는 별갑색(鼈甲色)을 인위적으로 내서 이것을 기조로 한 각종 천목(天目:술잔 또는 찻잔) 등 공예적 기교를 다한 것이 나왔다. 건요(建窯)도 역시 천목의 명산지이다.
명대(明代)에는 양상이 바뀌어 청자나 백자가 무지(無地)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하(釉下)에 코발트의 청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청화자기(靑華瓷器)와 오채자기(五彩瓷器)가 매우 성행한다. 청화자기나 오채자기는 징더전요에서 창시되었고, 또 명대의 초기, 징더전에 관요(官窯)가 설치되면서 징더전의 우위는 확고해졌다.
선덕요(宣德窯)의 청화는 명 ·청을 통해서 가장 뛰어나고, 가정요(嘉靖窯)의 청화 ·오채도 호화찬란하고, 작품 역시 변화무쌍하였다. 만력요(萬曆窯)는 명자(明瓷)의 난숙기이며, 형태도 박진감이 넘치고, 색채도 화려하여 외국에 많이 수출되었다.
명말 동란의 시기에 관요의 지도적 지위가 상실되고, 민요(民窯)에서 자유분방한 청화 ·오채가 양산되었다. 또한 룽취안요는 원(元) ·명초(明初)를 통해서 소위 천룡사청자(天龍寺靑瓷)를 양산하나 명의 중기 이후부터 징더전의 번영에 눌려 급격히 쇠미해진다.
강희(康熙) 연간에는 명대보다도 강력한 정치권력 아래에서 어기창(御器廠)이 재건되어 그 활동도 눈부셨다. 또한 갖가지 새로운 기법이 개척되고, 옛 기법의 재현도 시도되어 정교한 자기가 제작되었다. 청화 ·오채 외에 강희의 소삼채(素三彩) ·낭요(郞窯) ·옹정(雍正)의 두채(豆彩) ·분채(粉彩), 건륭(乾隆)의 분채 ·협채(夾彩) 및 갖가지 단색채는 청조를 대표하는 자기들이다.
그러나 건륭 이후는 기술적 발달로, 오히려 기교적 교치(巧緻)를 다투는 경향이 강해졌다. 태평천국의 난 이후에 징더전요는 심히 퇴폐하여 중국의 도예는 쇠미해졌다.
<칠공예>
중국의 칠공예는 동양의 독특한 것으로서, 칠나무가 분포하는 중국 ·한국 ·일본 ·타이 ·미얀마 등 여러 나라에서 옛날부터 성행하였다. 문헌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순제(舜帝) 시대부터 칠을 사용했다 한다. 현재 가장 오래 된 것은 서주대(西周代)의 유품이다. 원래 칠에는 견고성이 갖추어져 있어 기물을 보호하는 데 가장 적합한 도장액이다. 이러한 칠의 특질을 알게 된 중국인은 거기에서 지속성 ·영속성을 찾아내었다.
칠공예가 활발히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한대부터이다. 이 시기에는 관영 공장이 쓰촨성[四川省] 지방을 중심으로 설립되었으나, 당대까지의 칠공예의 발자취는 해명되지 않은 상태이다. 당대의 칠공예도 역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한대에 유행한 가식기법(加飾技法)은 거의 칠화(漆畵)에 한정되었고, 당대가 되면서 평탈(平脫) ·나전(螺鈿) ·목화(木畵) 등 매우 다양한 장식기법이 채용되었다. 이 시기는 화려한 상감기법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송대가 되면서 칠공예는 조칠(彫漆)과 무문칠기(無文漆器)가 주축을 이루어 발달하게 된다. 조칠은 이미 당대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송대에 이르러 뛰어나게 진보되어 성행한 듯하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전혀 가식하지 않은 흑칠도(黑漆塗) 칠공법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무문칠기에서는 형태를 중요시하고 한결같이 동시대의 청자와 호응하는 점은 흥미롭다. 또 쟁금(鎗金) 기법이 새로 개발되고, 칠공예의 기법은 거의 송대에 갖추어진다. 원대의 칠공예 산지는 저장성[浙江省]이 중심인 듯 싶고, 장성(張成) ·장무(張茂)와 같은 명공이 배출되어 특히 조칠에서 뛰어난 조형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편, 창금도 성행한다.
원대의 기법은 그대로 명대에 답습되어, 관영인 과원창(果園廠)이란 공장이 설립되어, 훌륭한 작품이 잇따라 제작되었다. 이렇게 융성한 칠공예는 청대에 들어서면서, 섬세 교치한 기술에 고집하게 되었고, 그 결과 종래의 칠공예에서 볼 수 있었던 풍부한 조형감각이 사라져버렸다.
<염직>
중국의 염직은 이미 한대에 뛰어난 견직물(絹織物)이 만들어진 것이 중앙아시아의 누란지방(樓蘭地方)과 외몽골의 노인울라에서 출토된 유품에서 엿볼 수 있다. 한대 이전은 비내구성 ·소모품이라는 섬유가 가지는 특수성으로 유품을 얻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한대 유품의 자수(刺繡) ·금(錦) ·능(緩) ·나(羅) 등의 원류(源流)가 상당히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전국시대의 청동제 인물상에 나타나는 착의의 정교한 가식(加飾) 문양과 같은 전국시대의 허난성[河南省] 진춴[金村] 고분출토의 수렵문경(狩獵文鏡)에 그려진 기마인물의 갑옷 아래에 보이는 의복에서도 추측된다.
육조로부터 삼국(三國)을 거쳐 수(隋)에 이르는 동안은 한대 염직의 전통이 이어져나가지만, 실크로드를 통한 서방과의 접촉이 점차로 밀도를 더함에 따라서 문양 ·기술면에 서방적인 영향이 가해지고, 당대에는 그 정점에 달한다.
비단에 색실 사용법의 날실[經絲]에서 씨실[緯絲]에의 이행도, 중국 본토에서 행하여진 자발적 기법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란의 사위금(絲緯錦)의 유입이 직접적 자극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송대에 들어서서 염직품은 세계적인 것으로 확립된다. 이것은 원나라 때 혼란을 가져오지만, 명으로 들어서면서 송에의 복귀라는 르네상스적 기풍과 인도 ·유럽과의 교류로, 더욱 순화되어 화려해진다.
금란(金爛) ·단자(緞子) ·간도(間道) 등의 염직품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청대의 염직공예는 대체로 명대의 계승이라 간주되지만, 표면적인 화려함을 추구한 나머지 말초적인 기술에 구애받게 된다. 그리고 청대 중기 이후는 이 기술마저도 조잡해져서 옛 면목은 사라져버리게 된다.
중국의 건축
중국건축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건축의 하나이나, 그 최초의 것은 양사오문화기[仰韶文化期:BC 4500∼BC 3500] 무렵부터라고 추정된다. 양사오기의 수혈주거에는 1주(一柱) 또는 4주, 6주의 주혈(柱穴)이 있는 유적이 있고, 지상의 낮은 벽과 풀로 이엉한 지붕을 가졌고, 특히 마루바닥과 벽에 걸쳐서 여물을 섞은 흙으로 벽토를 단장하고, 기둥에 초석을 놓은 것이 두드러진 특색이다.
이어서 룽산문화[龍山文化]를 거쳐 BC 1500년 무렵부터 은나라에 이르러 기단(基壇)을 가진 궁전건축이 성립된다. 은의 궁전에서는 아직 기와는 발견되지 않고, 이어서 서주(西周) 말기에 발견된 기와의 단편은 평와상(平瓦狀) 기와이며 안팎이 있다. 암키와와 수키와는 전국시대에 나타나고, 추녀의 와당(瓦當)도 전국시대부터이다.
중국건축은 목조이며 그 기본적인 구조는 한대의 궁전건축에서 완성되며, 이후 중국건축에서 큰 변화를 찾아볼 수 없다. 한대의 건축 유구(遺構)는 존재하지 않지만, 전(塼) ·돌에 새긴 회화나 발굴유적을 살피면, 기단이 있고 둥근 기둥에는 주춧돌을 받치고, 주두(柱頭)는 공포(栱包)를 짜맞추었다. 기와지붕이 일반적이고, 지붕 ·처마의 곡선, 박공 ·부연도 이 때부터 나타나며, 옥내에는 우물반자도 나타난다.
목조건축의 유구는 당대 782년의 묵화(墨畵)가 있는 산시성[山西省] 우타이현[五臺縣]의 남선사 대불전(南禪寺大佛殿)이 가장 오래 된 것이고, 같은 우타이의 불광사 대전(佛光寺大殿)이 그 다음이다. 한대를 지나면 중국건축의 발전은 주로 세부 수법, 특히 처마의 공포의 정치(精緻)한 꾸밈에 한정된다.
또 대규모의 건축을 빨리 완성할 필요성에서, 건축의 규법을 편찬한 《궁조방식(宮造方式)》이 북송대 말(1103년간) 이계(李誡)에 의해서 저술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건축용재의 결핍을 보충할 목적이면서 용재를 절약하고, 부재(部材)를 세소(細小)하게 조립하는 것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 결과, 명 ·청대까지 건축은 정치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궁전 ·사찰 등 건축의 종별에 의해서 형식 ·구조가 다같이 변화가 거의 없고, 배치도 어느 것이나 중축선(中軸線)을 가지고 있고, 좌우 대상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중국의 서예
현존하는 최고의 한자(漢字)는 은의 갑골문(甲骨文)인데, 그 구조 원리는 매우 진보된 것이다. 그 후는 각 시대, 각 인의 기호나 실용성을 반영하여 전(篆) ·예(隸) ·초(草) ·행(行) ·해(楷)의 서체가 생기고, 각 서체에 따라 미의 극치가 추구된다.
서예는 중국미술 가운데 회화와 더불어 독립된 예술로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자를 감상의 대상으로서 보는 서법 의식이 싹튼 것은 한대부터이며, 마침내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에 의해서 그 때까지의 기교를 종합하고 그의 창의를 가미한 서법이 완성된다.
중국의 서예는 이 왕희지의 서풍을 절대적인 것으로서 숭상하는 전통파와, 그것에 반발하여 독자적인 서예를 창조하려는 혁신파의 두 큰 흐름에 의하여 성쇠의 주류를 이룬다. 당대는 이 왕희지의 전형에 따르는 세력이 강하였고, 구양 순(歐陽詢)은 그 대표적인 작가이다. 송대가 되면, 전통적인 서체에 반발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미불(米芾) 등은 주관을 존중하는 비교적 자유로운 서체를 형성하고, 원대에는 조맹부(趙孟)가 나타나, 고법(古法)의 문란을 교정하고, 고인의 필적을 연구하여 복고주의를 제창하였다. 송 ·원의 서체는 그 이전의 수 ·당의 서체에 비하면 인간미가 있는 정감이 충만한 것이 많다. 명대에는 문징명(文徵明)이나 동기창(董其昌) 등 명필이 나왔으나, 일반적으로 기백이 없고 기교적인 특색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중국에서 서예는 한자 발생 이래 3500여 년의 역사를 배경으로 서체의 변천을 거듭하면서 깊고 아름다운 정신의 통일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하여 발달하여 왔다.
서예는 육예(六藝:禮 ·樂 ·射 ·御 ·書 ·數)의 하나로서 필수 교양과목이며, 시 ·서 ·화(詩 ·書 ·畵) 삼위일체의 대표적 예술표현으로서 숭상되었고, 역대의 천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문학을 소재로 한 예술인 만큼, 서예의 조형성 ·정신성을 감상함과 더불어 문맥을 따라 그 내용 ·문학성을 음미하는 것이다.
중국의 서예는 매우 논리적이고, 서법적(書法的)이다. 아무리 함부로 쓴 글씨일지라도 1점 1획의 운필은 반드시 서법에 따르고, 문자의 결구(結構)는 단정 또한 건축적이며 일행(一行)마다의 주장이 강하다. 필압(筆壓)이 강하고, 선질(線質)은 중후하고, 끈질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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