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그림들

손....손.....손...

레이지 데이지 2011. 12. 29. 00:01

1. 

후쿠오카에서  버스타고가는 중 카메라로 내가 찍은 손.

난 이 손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조각칼에 손을 다쳐 기형이 된 손톱조차 이뻐했다.

이 손은 나만 만져주기를 바라고 원했다.

근데....

내 욕심이 과했나...

 

예술 노동자의 손은 거칠것이라 미리 생각하면 오산이다.

손이 부드럽다.

 

 

 

2.

 


     -이병갈- *希星

 

...
말하지 않으나 말하며

눈은 없으나 보며

숨기고 드러내며

교만하나 겸손하며

창이면서도 방패


이타적이나 이기적이며

나이면서도 손님 같은 손


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마침내 작별할

멀고도

가까운 나


만일 사람에게

두 손이 없다면

무슨 수로 기도하리

<詩作 노트>이병갈

손이 사람과 동물을 구분해주는 중요한 지체일 뿐만 아니라 삶의 상당한 부분을 영위해 주고 있음에도 우리는 손을 그저 몸에 붙어 다니는, 나뭇가지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의식을 온통 그 사람의 얼굴, 체형 같은 시각적인 것에만 집중하여 그 사람의 특성을 금방 재단하고 만다. 근데 가만 손을 생각해보면 그 다양한 수행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진화론에 따른다면 인간의 진화는 손의 진화와 궤를 같이해 왔다고 말하고 싶다.

손의 기능과 역할을 열거해 보라! 그러면 우리는 깜짝 놀라 내일부터 당장 손에 대해 감사를 느낄 것이다. 우선, 손은 각양각색의 밥벌이 수단이다. 손일로 먹고 사는 직업은 얼마나 많은가? 나열하면 입이 아플 것이다. 거의 모든 예술, 스포츠 분야의 성취도 손에 의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삶의 영위 수단으로서 온갖 감정을 표현할 수 있으니 얼마나 큰 하느님의 사랑인가! 그것도 두 개씩이나 주셨으니 적어도 사람이라면 하루에 한 번쯤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야 되지 않겠는가? 혹,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인 사유로 손이 없다면 마음속으로나마 손을 그리며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손은 동전의 양면, 칼의 양날처럼 그 쓰는 이의 의도에 따라 선과 악의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절대 악의 세력과 악수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아무튼 인생의 마지막까지 양 손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잘 간수할 작정이다.

 


 3.

로뎅의 손- La Cathedrale (대성당)

 

 

 

처음으로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제목이 대성당...의아했다.

것도 일반 성당도 아니고 주교가 직접 집전하는 대성당이다.

나였다면...희구...갈망 ...염원...기도....이 중에서 골랐을 것이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두사람의 각기 다른 손으로 보였고  갈망하는 손으로 보였다.

닿으락 말락하는 ...떨림이 없은 자연스런 신의 부름에 호응하는듯이..

서로의 공유를 막 시작하려는 시작의 떨림은 있어 보인다. 아마도. 

 

처음부터

손바닥 전체를 깊이 맞댄다면 처음에는 흡족해도 시간이 갈수록 상대의 촉감이 둔해지고 결국 사라졌을 것이다. 심지어 땀이 배어 불쾌해질지도 모른다. 손을 잡는 행위로 구애를 시작한 연인들은 결혼을 통해 서로의 몸과 영혼을 구석구석 탐사한 다음,

노년에 이르면 다시 가볍게 손을 잡고 산책하게 되리라.

실제로 캐나다에서 보았지 않는가..

 

[김혜리]씨네21 기자.

...............

로댕은 손의 위대한 감식자이자 창조자였다. 한때 그의 비서였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작업장의 무수한 손 조각들을 가리켜 “어떤 손은 걷고 있고, 어떤 손은 자고 있으며, 어떤 손은 깨어 있다”고 묘사했다. 교회와 성당의 건축 양식을 깊이 탐구했던 로댕이 특별히 이 작품을 <대성당>으로 명명하기로 한 결정은 더없이 적절해 보인다. 달걀 한알을 쥘 만한 압력도 들어가지 않은 관절이 그리는 우아한 아치, 그 아래 깃들어 있는 균형과 겸허, 고양감과 한없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로댕이 발견한 고딕 양식이 지닌 아름다움의 요체가 아니었을까.

 

위대한 예술가의 비전을 갖지 못한 평범한 우리에게도 손은 충분히 성스러운 기관이다. 손은 두뇌와 더불어 인간에게 신을 흉내내는 행위를 허락한다. 손가락을 모으면 사물을 담을 수 있는 조그만 그릇이 되고, 활짝 펴면 가지가 되어 우리를 통과하는 세상의 바람을 느끼게 한다. 손은 어떤 신체 부위보다 빨리 굳고 주름져 노화를 드러내지만, 끝내는 시력과 청력이 떠나간 뒤에도 우리 곁에 남아 세상의 홈과 마디를 촉지하게 해줄 것이다. 술이든 음악이든 우리가 무언가에 깊이 취했을 때 타인의 손을 가만히 잡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아름다움을 영접한 순간 성소에 들어가고 싶은 본능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정념이 질료 덩어리 속에서 거의 뛰쳐나오려 하는 로댕의 관능적인 전신상들에 비해 <대성당>은 고요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수많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찍어 인터넷에 올린 <대성당>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이 소박한 조각이 다양한 앵글과 빛의 상태에 따라 얼마나 상이한 노래를 부르는지 알게 된다. 훌륭한 건축물이 그렇듯이 <대성당>은 모든 면(面)을 통해 호흡한다. 미술비평가 베르나르 상파뉠르는, 로댕이 인간의 얼굴에 미소를 조각한 적이 없다고 썼다. 그러나 <대성당>의 손은 분명히 미소짓고 있다.

 

4.

만감이 교차하는듯...너무나 직접적인 약속이다.

상대를 꼬시기에 급급하다.

 

<그림>나현정 <교감 1>-제17회 행주미술대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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