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詩의 翅

서정주- 신부<질마재 신화>(1975)

레이지 데이지 2012. 5. 11. 21:58

신 부

      - 서정주 -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개관 정리]

◆ 성격 : 전통적, 낭만적, 토속적, 신화적, 서사적

◆ 표현 : 산문적 내재율

              서사적 구성 방식

              전반부와 후반부의 대칭적인 구조(각각 '∼ 버렸습니다'로 끝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돌쩌귀 → 문짝에 경첩처럼 다는 쇠붙이 물건

    * 그러고 나서

  → 행을 바꾼 것은 신랑이 도망친 이후 40~50년이라는 시간이 경과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

    * 매운 재 → '재'는 어떤 사물이 불에 다 타고난 마지막 형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사물의 생명이 이미 없어진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매운 재'는 진한 잿물을 내릴 수 있는 독한 재로 신부의 원한이

   쌓인 것을 나타낸다. 

      곧 그 기다림의 세월이 얼마만한 고통과 인내의 세월이었는가를 의미함.

    * 초록 재와 다홍 재

→ 초록 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신부의 영적 존재의 아름다움을

             의미함. 곧 이 작품을 한 차원 상승시키는 원동력이 됨.

 

◆ 주제 : 여인의 정절

◆ 문학적 의의 :

생명파 시인인 미당 서정주가 초기의 퇴폐적이고 상징적 원죄의식에서 벗어나

신라와 불교에 대한 관심을 거쳐 가장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정취에 몰입한 시기에

창작된 작품으로, 한국 여인의 매운 절개를 놀랍도록 담담하고 짧은 이야기체로

엮어 놓은 점에 가치가 있다.

 

[시상의 흐름(짜임)]

◆ 전반부 : 순간적인 오해로 신부를 버리고 달아난 신랑의 이야기

◆ 후반부 : 달아난 신랑을 기다리다 재로 변한 신부의 이야기.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시집 <질마재 신화>에 실린 작품으로, 우리 전래의 '이야기'를

시적 소재로 삼고 있다.

그 세계는 상당히 정적이고 신비적인 정서를 지녔다.

40~50년 동안 한자리에 고스란히 앉아 있더라는 이야기는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황당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이야기 속에 인생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담아내고 있다.

이 시는 고대로부터 전해 오는 전설을 소재로 한 것이기에 어려운 시적 의미나 상징들은 그다지 찾을 수 없다.

단지 한 편의 이야기를 시적 서사로 풀어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신부가 첫날밤에 신랑의 터무니없는 오해로 인해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

이 시의 '이야기'다. 사려 깊지 않은 신랑의 행위, 섣부른 오해, 성급한 판단 등 인간의 여러 우연적 행동과 신부의 비현실적인 기다림은 이 시의 현실적,  비현실적 요소가 된다. 신부의 수동적이고 침착한 기다림과 신랑의 조급성이 첨예하게 대립됨으로 인하여 이 이야기는 그 비극성을 한층 고조시키는데, 신부의 이런 매서운 기다림은 자발머리없는 신랑에 대한 수동적인 저항의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그러한 저항은 신부의 적극적인 의지를 배경으로 할 때에만 가능한 이야기가 되는데, 이런 적극적 기다림은 결국 자기 소멸을 향해 치닫게 된다.

한편으로는 우연에 지배당하는 인간의 나약한 심성이 어떻게 운명론에 순응해 나가는가를 보여준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는 인간 역사의 아이러니가 숨 쉬고 있다. 이것이 어우러져서 드러나는 의미 구조를 읽어내는 것이 이 시를 제대로 감상하는 길일 것이다.

 

시집 『질마재신화』는 총 45편으로 구성된 서정주의 현대 시집이다.

질마재는 제도적인 틀에 의해 평가되고 결정되는 완전성을 지향하는 사회가 아니며, 인간의 존재에 대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이다.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지배와 피지배 사이의 관계 역전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절대성의 해체로 인하여 다의적인 가치관이 상존한다. 심지어 마을 존립에 있어서 가치 혼돈을 초래한 이들까지를 수용하는 과감성을 지닌 유동적인 공간이다.

질마재는 불가사의한 사실들과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힘을 발휘하는 세계이며, 주체보다는 절대성 여부로 모든 것이 평가받고 판단되던 시대의 이야기에 해당한다. 서정주『질마재신화』에는 주술성이 위력을 발휘하는 흔적들을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질마재신화』미당 서정주의 정신 세계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였던 고향 질마재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한국의 토속적인 아름다움을 집약하고 있다.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하여 근대와 문명이라는 변화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린 진정한 우리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그리고 그것들이 주는 미덕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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