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詩의 翅

류근 - 시바 시인.

레이지 데이지 2012. 5. 30. 23:33

그는 이름하여 시바 (?)시인이라 추앙받는다.

시바교 교주이다.

시바교, 그리고 시바교주 절대신자.

 

 

 

<편지를 쓴다>

내가 사는 별에는 이제
비가 내리지 않는다
우주의 어느 캄캄한 사막을
...
건너가고 있는 거다
나는 때로 모가지가 길어진 미루나무
해 질 무렵 잔등 위에 올라앉아
어느 먼 비 내리는 별에게 편지를 쓴다
그 별에는 이제 어떤 그리움이 남았느냐고,
우산을 쓰고 가는 소년의 옷자락에
어떤 빛깔의 꽃물이 배어 있느냐고,

우편배달부는 날마다 내가 사는 별
끝에서 끝으로 지나가지만
나는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나는 늘 이 별의 한가운데 살고 있으므로
날마다 우주의 사막을 가로질러가는 시간의 빛살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거다
그래도 나는 다시 편지를 쓴다
비가 내리는 별이여
우주의 어느 기슭을 떠돌더라도
부디 내가 사는 별의 사소한 그리움 한 방울에
답신해다오

나는 저녁놀 비낀 미루나무 위에서
못난 까마귀처럼 가만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운다

_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2010.

 

 

<계급의 발견>

...
술이 있을 때 견디지 못하고
잽싸게 마시는 놈들은 평민이다
잽싸게 취해서
기어코 속내를 들켜버리는 놈들은 천민이다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술 한 잔을 다 비워내지 않는 놈들은
지극한 상전이거나 노예다
맘 놓고 마시고도 취하지 않는 놈들은
권력자다


한 놈은 반드시 사회를 보고
한두 놈은 반드시 연설을 하고
한두 놈은 반드시 무게를 잡고
한두 놈은 반드시 무게를 잰다


한두 놈은 어디에도 끼어들지 못한다
슬슬 곁눈질로 겉돌다가 마침내
하필이면 천민과 시비를 붙는 일로
권력자의 눈 밖에 나는 비극을 초래한다
어디에나 부적응자는 있는 법이다
한두 놈은 군림하려 한다
술이 그에게 맹견 같은 용기를 부여했으니
말할 때마다 컹컹, 짖는 소리가 난다


끝까지 앉아 있는 놈들은 평민이다
누워 있거나 멀찍이 서성거리는 놈들은 천민이다
먼저 사라지는 놈들은 지극한 상전이거나 노예다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은 놈은
권력자다
그가 다 지켜보고 있다.

-시집『상처적 체질』 (문학과 지성사, 2010)

 

 

불안을 극복하고, 공포를 극복하고 오늘날 바야흐로 새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람들 보면 킥, 웃음이 난다. 우울을 극복하고, 절망을 극복하고 날마다 바야흐로 새 삶을 살고 있다는 사람들 보면 캑, 목이 막힌다.

그들이 극복한 것은 불안도 공포도 우울도 절망도 뭣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가벼운 핑계들을 잠시 알고 있었을 뿐이다. 가벼운 느낌들을 잠시 붙들고 있었을 뿐이다.

불안과 공포, 우울과 절망 같은 것들은 극복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불안을 느끼는 것과 불안을 깨닫는 것은 다르다. 공포를 느끼는 것과 공포를 깨닫는 것은 다르다.
...

우울과 절망이 느낌이라면 그것은 곧 지나간다. 하지만 불안을, 공포를, 우울을, 절망을 깨달아버린 거라면 그것들은 절대 지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불안과

공포, 진정한 우울과 절망은 깨달음의 세계다. 가벼운 느낌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한 번 깨달은 것이 무슨 수로 극복될 수 있겠는가.
극복된 깨달음은 가짜다.
.
사랑도 그와 같다. 시바,

 

 

안구건조증이 다시 심해졌다. 자다가도 눈이 불편해서 일어나 앉을 지경이다. 몸에서 알콜 기운이 빠져 나가면 온 몸 여기 저기서 모처럼 정신 돌아온 주인에게 뭔가를 고자질하기 위해 아우성이다. 술 마시고 댕길 땐 멀쩡하던 속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오른쪽 아랫배 부근도 조금 아픈 것 같고, 그러고 보니 간 앞의 갈빗대도 조금 뻐근한 것 같다. 영혼은 그 사이에 모범적으로 더 많이 망가져 있다.

수면장애가 심해졌다. 한두 시간씩 얕은 잠에 들었다가 혼곤한 꿈에 시달리다 깨어나는 게릴라식 수면 패턴의 반복. 하룻밤에도 옴니버스 컬트 영화 대여섯 편을 찍는다. 꿈은, 어쩌면 그렇게도 생생하고 사실적인가. 어쩌면 그렇게도 불쾌하고 불편하고 불친절한 것 투성인가. 꿈속에서 조낸 얻어터지고, 자빠지고, 모서리에 간...신히 매달리고, 물에 빠지고, 모욕 당하고, 능멸 당하고, 삥 뜯기고, 마침내 빵배틀까지 당하고 나서 간신히 일어나면 먼 나라 전쟁에서 수년 만에 귀향한 상이용사 같다. 아침부터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고 싶다.

그러니 그대여, 어젯밤 술도 아니 마시고 아픈 데 하나 없이 소록소록 잘 주무시고 일어난 그대여, 오늘 무슨 희망으로 눈을 떴는가. 그대 앞에 놓인 안락과 지복과 평화를 위해 밤새 무슨 찬양을 꿈꾸었는가. 아무래도 나의 가장 큰 지병은, 술에서 풀려나고 나면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것, 어떠한 기다림도 내 것이 아니라는 것, 아침이 재앙이라는 것, 아침부터 치욕이라는 것.

꽃신 신고 군대나 한 번 더 댕겨 올까. 어떠한 비겁과 무지와 폭력도 다 아름답게 봉분을 쌓아주는 곳. 아, 슬슬 제정신이 돌아오려 한다. 어서 라면 먹고 학교나 가자, 시바!

 

사람 만날 때마다 술 마시는 버릇, 못 쓰겠다. 반갑다고 한 잔, 오랜만이라고 한 잔, 그동안 왜 연락 안 했냐고 따지면서 한 잔, 곧 헤어질 거니까 한 잔, 다시 만나자고 한 잔, 그러다 새로 사람이 더 왔으니 한 잔, 할 이야기 별로 없으니 한 잔, 이야기 다시 재미 있어지니 한 잔, 그러다 취해서 한 잔, 진짜 취해서 또 한 잔, 조낸 취해서 또 한 잔.... 아, 시바! 이러다 제 정신으로도 못 죽고 열반주에 취해 저승 가시겠고나. 월요일에도 술몸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꼬락서니, 나조차 염증난다. 쫌 제발 결별하자, 이 놈의 술귀신!>

 

 

 

'시바'
고도의 문화를 가진 도교체계들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숭배되어 온 神.
베레나스는 시바의 도시이다.

시바는 창조와 파괴의 신이기도 하지. 인도에서 가장 사랑받는 신 가운데 하나
* 베나레스는 흰두교의 성지. 인도 북부 갠지스강 변에 있음.
화장터로 유명한 바라나시의 옛이름이죠. 베나레스 힌두대학이 있는도시


 <미안하다. 내가 지난 봄날 꽃이 피어서 울고, 꽃이 져서 울고, 우주의 온갖 물기들을 데려다 우는 바람에 지상에 비가 내리지 않는다. 지상에 남겨진 물기마저 술로 바꿔 마셨으니 강물마저 못 견디고 말라 버렸다. 아아, 이 무거운 죄를 무엇으로 씻을 수 있을 거신가. 참회의 뜻으로 원산폭격 104초의 형벌을 스스로 선고하였으니, 내가 흘린 땀방울을 수증기 삼아 부디 104년만의 가뭄이 거두어지기를! 아아, 시바! 조낸 시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