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지와 보지의 어원.
(누구나 궁금해하는 말의 유래...)
<백사-이항복과 퇴계-이황의 일화>
선조 임금은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에 은거해 있던 퇴계 이황을 다시 불렀다.
이 유명한 지식인이 입궐할 무렵,
궁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많은 관리들이
성리학에 대해 가르침을 얻고자
그를 남문 밖의 한적한 곳으로 모셨다.
퇴계에게 수많은 현학적인 질문이 쏟아질 때였다.
얼굴이 희고 뺨이 붉은 소년 하나가 다가와
공손히 고개를 숙여 절을 하고는 말했다.
“듣자 하니 선생께서는 독서를 많이 하셔서
모르시는 바가 없다고 하시기에
평소에 궁금하게 여기던 것을
여쭤보고자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아무쪼록 배우고 싶은 마음을 물리치지 말아주소서.”
퇴계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그대가 알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 우리 말에 여자의 아래에 있는
소문(小門)을 "보지"라 하고
남자의 양경(陽莖)을 "자지"라 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이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까...???”
곁에 있던 백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퇴계는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고는
자세를 바로한 뒤에 천천히 대답을 했다.
“여자의 소문(小門)은
걸어다닐 때, 감추어지는 것이라고 해서
‘보장지(步藏之)’라고 하는데, 발음하기 쉽도록
감출 장(藏)이 빠지고 "보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의 양경(陽莖)은
앉아 있을 때, 감추어지는 것이라고 해서
‘좌장지(坐藏之)’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좌지"가 되고 다시 자지로 된 것입니다.”
“예.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하나 더 묻겠습니다.
여자의 보지를 "씹"이라 하고
남자의 자지를 "좆"이라고 하는 건
또 무슨 까닭입니까?”
몇몇 관리들은 낯뜨거운 질문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면서 자리를 뜨고
몇몇은 소년에게로 다가가 그를 끌어내려 했다.
그러자 퇴계는 손을 저어 제지하더니,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을 이었다.
“여자는 음기를 지녀서
축축할 습(濕) 자의 발음을 따라, ‘습’이라 한 것인데,
우리 말은 된소리를 내는 것이 많아서 "씁"이 되고
다시 편하게 말하느라 "씹"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는 양기를 지녀
마를 조(燥)의 발음을 따 ‘조’라고 한 것인데
이것, 역시 발음의 뒤를 세워
강조하느라 "좆"이 된 것입니다.”
소년은 그제서야 고개를 다시 숙인 뒤
물러나며 말했다.
“예. 말씀을 들으니 이치를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때 소년의 거동을 살피던 벼슬아치들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뉘 집 자식인지는 모르나,
어린 아이가 어른들 앞에서
저런 무엄하고 천한 질문을 하는 것을 보니
필경 버린 자식-호로자식임에 틀림없을 거외다.”
그러자 퇴계는 결연하고
묵직한 음성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그렇게 단정을 하십니까?
세상의 학문이란,
가장 근본적이고 가까이 있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날 때
"자지"와 "보지"를 몸의 일부분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고
당연히 그것의 명칭에 대해
궁금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을
어찌, 상스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음"과 "양"이
서로 비속한 마음과 어지러운 관계로
서로 합하여 세상의 윤리와 기강을
흔들어놓는 거기에서
천박하고 상스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 까닭은
자칫 우리가 범하기 쉬운 천박한 행동과
욕망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지,
저 소년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진상을 알고자 하는 것을 억압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음양의 근본과 이치를 탐구하는
저 소년의 마음이야 말로
우리가 궁구하는 "성리학"의 근본을 성찰하려는
진지한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저 소년은 장차 세상 음양의 조화를 잘 살펴
변화에 맞게 세상을 이끌어갈 큰 인물
-뛰어난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그 소년이 바로, 백사-이항복이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1556(명종 11)∼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 또는 백사(白沙).
고려의 대학자 제현(齊賢)의 후손으로
참찬 몽량(夢亮)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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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이황 (李滉 ; 1501~1570)
이황(李滉, 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교육자, 화가, 시인이다.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사상가, 교육자이자 화가,
대성리학자였다.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과거 급제 후,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사화(士禍)와 훈구파 내부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관작을 사퇴한다.
1528년(중종 23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다가
1534년 문과에 급제, 관직에 나갔으며
홍문관의 관직을 거쳐 풍기군수 등을
역임했다. 풍기군수 재직 시절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임금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 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고,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1545년 형인, 온계-"이 해"가
을사사화로 희생된 뒤,
여러 번 관작이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뒤 공조참판, 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1569년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사상은 그의 직제자 김효원(金孝元)이
동인의 당수가 된 이후,
동인으로 전달되었으며, 남인으로 이어졌고,
북인 일부에게도 계승된다.
소고-박승임, 서애-류성룡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는데,
후일, 동인이 분당된 뒤 박승임의 제자는 남인 일부와
북인 일부로, 류성룡과 그의 후예들은 남인으로 이어진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저서들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
퇴도(退陶)·퇴도만은·도수(陶叟),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사후에,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
진사(進士) 증 의정부좌찬성 이식(李埴)의 아들이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동인과 남인 계열의 종주이며
일부 북인도 그의 문인들이었다. 그는 이우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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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無碍)
퇴계-이황 선생의 시대를 뛰어넘은 크나큰 마음.
퇴계선생의 맏아들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한창 젊은 나이의 맏며느리는 자식도 없는 과부가 되었다. 퇴계 선생은 홀로된 며느리가 걱정이었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젊은 며느리가 어떻게 남은 긴긴 세월을 홀로 보낼까?' 그리고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집이나 사돈집 모두에게 누(累)가 될 것이기에, 한밤중이 되면 자다가도 일어나 집안을 순찰하곤 했습니다. 어느날 밤,
집안을 둘러보던 퇴계선생은 며느리의 방으로부터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순간 퇴계 선생은 얼어 붙는 것 같았습니다. 점잖은 선비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며느리의 방을 엿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며느리가 술상을 차려 놓고 짚으로 만든 선비 모양의 인형과 마주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형은 바로 남편의 모습이었다. 인형 앞에 잔에 술을 가득 채운 며느리는 말했습니다. "여보, 한 잔 잡수세요." 그리고는 인형을 향해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흐느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남편 인형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는 며느리.......! 한밤중에 잠못 이루고 흐느끼는 며느리........! 퇴계 선생은 생각했습니다.
'윤리는 무엇이고 도덕은 무엇이냐? 젊은 저 아이를 수절시켜야 하다니.........!
저 아이를 윤리 도덕의 관습으로 묶어 남은 평생을 수절시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다, 인간의 고통을 몰라주는 이 짓이야말로 윤리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다. 여기에 인간이 구속되어서는 안된다. 저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이튿날 퇴계 선생은 사돈을 불러 결론만 말했습니다.
"자네, 딸을 데려가게." "내 딸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잘못한 것 없네. 무조건 데려가게." 친구이면서 사돈관계였던 두 사람이기에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딸을 데리고 가면, 두 사람의 친구 사이마저 절연하는 것이기 때문에 퇴계선생의 사돈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안되네. 양반 가문에서 이 무슨 일인가?" "나는 할말이 없네. 자네 딸이 내 며느리로서는 참으로 부족함이 없는 아이지만, 어쩔 수 없네. 데리고 가게." 이렇게 퇴계선생은 사돈과 절연하고 며느리를 보냈습니다. 몇 년후, 퇴계선생은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날이 저물기 시작했으므로 한 집을 택하여 하룻밤을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저녁상을 받아보니, 반찬 하나하나 모두가 퇴계선생이 좋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더욱이 간까지 선생의 입맛에 딱 맞아서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 집 주인도 나와 입맛이 비슷한가 보다...!' 이튿날 아침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반찬의 종류는 어제 저녁과 달랐지만 여전히 입맛에 딱 맞는 음식들만 올라온 것입니다. 나의 식성을 잘 아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이토록 음식들이 입에 맞을까? 혹시, 며느리가 이 집에 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퇴계선생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막 떠나가려는데, 집주인이 버선 두 켤레를 가지고 와서 '한양 가시는 길에 신으시라'며 주었습니다. 신어보니 퇴계선생의 발에 꼭 맞았습니다. 아...! 며느리가 이 집에 와서 사는구나...!' 퇴계선생은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을 보나 주인의 마음씨를 보나 내 며느리가 고생은 하지 않고 살겠구나.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짐작만 하며 대문을 나서는데 한 여인이 구석에 숨어서 퇴계선생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퇴계-이황 선생은 이렇게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를 개가시켰습니다. 이 일을 놓고 유가의 한 편에서는 오늘날까지 퇴계선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선비의 법도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다. 윤리를 무시한 사람이다." 하지만, 또다른 한 편에서는 정반대로 퇴계선생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퇴계-이황 선생이야말로,진정으로 인간을 위하고 윤리와 도덕을 올바로 지킬 줄 아는 분이시다. 윤리를 깨뜨리면서 까지, 윤리를 지키셨다."며... 이야말고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한차원 높은 윤리관이 아니겠는가...?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이런 훌륭한 분들이 바로 이 세상과 이 나라의 진정한 선각자요, 참된 선구자가 아니랴...?
(1) 得樹攀枝不足奇(득수반지부족기) 懸崖撤手丈夫兒(현애철수장부아) 나무에 올라, 가지 끝에 서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며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는 것이야말로 진정 대장부이로다.
[2] 靑山遮不住(청산차불주) 畢竟東流去(필경동류거) 청산은 가로막아도 강물은 결국 동쪽으로 흐른다.
'虛 靜 ...우두커니, 멀거니 > 낯설게 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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