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 靜 ...우두커니, 멀거니/낯설게 하기

책- 노자 (비움과 낮춤)

레이지 데이지 2012. 10. 17. 17:29

 

나는 그리워한다.

노자를, 그리고 비움과 낮춤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도가철학은 기본적으로 재야의 비판철학적 성격이 강하다. 이 점은 노자나 장자의 일생을 되짚어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은 현실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소박한 삶을 즐기면서 또는 자유로운 정신 경지에서 노닐면서, 세상에 대해 또는 국가 위정자들에 대해 종종 신랄한 비판의 화살을 날리곤 하였다.

『노자』 책 전체 내용은 노자가 생각하는 이상 정치인 무위정치의 실현에 집중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노자』에서는 우주 만물의 궁극적인 이치인 도의 본질을 따짐으로써 인간 사회의 이상적인 정치 형태는 무위정치라는 점을 제시하고, 무위정치 시행의 주체인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인격과 마음가짐을 논하며, 무위정치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안들을 거론하고, 무위정치를 실천함으로써 얻게 될 여러 효능들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노자』의 글 중 ‘비움’과 ‘낮춤’의 주제와 관련된 구절들을 모으고, 이를 다시 아홉 개의 소주제로 나누었다. 20년 이상 중국 한대漢代 사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이석명 교수는 노자가 쓴 글을 현대적 감각으로 풀고 해설하면서 선시禪詩로 감상의 소회를 한층 높였다. 이 책은 노자에 의지한 저자의 생각을 풀어쓴 철학 에세이다.

아주 오래된 길,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잊히지 않고 있는 길이 있다. 2500여 년 전 노자가 밟았던 길이다. 갈 길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 이제 노자의 길을 따라가 보자.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 년 전,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아주 오래된 나라에 한 늙은이가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이제 그만 세속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라 밖을 향해 길을 떠났다. 이때 국경 지역의 관문을 지키고 있던 한 사내가 늙은이를 알아보았다. 그 늙은이가 당대의 뛰어난 지식인이자 최고의 현자賢者라는 것을. 그래서 늙은이에게 졸랐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남겨놓고 떠나시라고.


오랜 고민과 망설임 끝에 마침내 늙은이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성급히 붓을 들어 주섬주섬 써내려갔다. 머리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다 쓰고 나니 대략 5000여 글자가 되었다. 글이 완성되자 늙은이는 사내에게 내던지다시피 하면서 황급히 관문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관문을 빠져나가는 순간 늙은이는 후회하였다. 밀려드는 후회와 부끄러움을 주체할 수 없어 늙은이는 휘적휘적 서쪽으로 내달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든 『노자』를 읽을 때 필연적으로 감지되는 하나의 중심적인 정서가 있다. 『노자』 전체를 꿰뚫고 흐르는 하나의 흐름이 있으며, 『노자』 전체를 감싸고 피어오르는 하나의 분위기가 있다. 그것은 소박함에 대한 강한 그리움이다. 국가 경영자로서든 양생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든 종교인으로서든 또는 그저 평범한 보통의 독자로서든, 『노자』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소박한 태도로 세상을 대하고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정’은 바로 통치자가 지녀야 할 핵심 덕목이었다. 왜냐하면 황로학에서 “군주의 도는 무위하는 것이고 신하의 도는 유위有爲하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이때 무위와 유위는 각각 ‘정’과 ‘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군주는 ‘정’을 통해 ‘동’을 행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곧 인재 활용론과 연결된다. 거대한 국가를 다스리는 데 통치자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감당할 수 없다. 때문에 훌륭한 통치자는 우수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그들의 능력에 맞는 실무를 맡긴다. 따라서 이때 통치자가 하는 일은 단지 깊은 궁궐에 고요히 머물면서 적재적소에 합당한 인재들을 등용하고, 그 결과에 따라 상벌을 시행하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군주가 인재들을 적절히 등용하고 활용하면 군주 자신은 몸소 행하는 일이 없어도 천하에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게 된다. 이런 게 바로 황로학에서 말하는 무위정치이다.
- 문 밖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안다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이상사회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소박한 원시공동체 사회를 꿈꾸는 이상주의의 산물이다’, 혹은 ‘시대에 역행하고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몽상에 불과하다’ 등의 비판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노자’가 정말로 이러한 이상사회를 꿈꾸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보았는지를 따지기에 앞서, 여기에 담긴 의미를 통찰할 필요가 있다. 중국 고대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말 그대로 ‘전쟁의 시대’로, 수많은 겸병전쟁을 통해 많은 ‘소국과민’의 작은 제후국들이 몇몇 ‘대국중민大國衆民’의 대국 속으로 하나씩 둘씩 통합되어 가던 혼란의 시기였다. 이러한 겸병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계층은 바로 일반 백성이었다. 백성은 그들끼리 서로 싸워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 원수진 일도 없었고 또한 서로를 죽여서 얻는 이익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지 몇몇 위정자들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는 사람들과 서로 싸우며 죽이고 죽는 고통과 희생을 겪어야만 했다. 노자는 당시의 모든 혼란상과 문제점이 바로 거대 제후국들이 추구하는 ‘대국중민’의 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19세기 일부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주의 정책에 의해 다수의 약소국들이 침략당하고 고통 받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이러한 상황에 반발하여 역으로 ‘소국과민’을 제창하였을 것이다. ‘소국과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소박한 삶에 지극히 만족하기 때문에 굳이 밖으로 나돌아 다닐 필요가 없다. 그러니 배나 수레와 같은 편리한 도구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 국가의 규모를 작게 하고 국민의 수를 적게 하라

 

책속으로

덜어냄의 이치를 통해, 노자는 세상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 충고한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국가의 경영에 뜻을 둔 위정자를 말한다. 세상을 경영하고자 하는 위정자는 무사無事 즉 일삼는 바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사’는 앞서 언급된 ‘무위’의 또 다른 표현이다. 무엇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욕심을 비우고 또 비워 마음을 지극히 고요한 상태에 이른 상태에서 행위 하는 것이 무위였듯이, ‘무사無事한다’는 것은 국가를 경영할 때 위정자의 욕심을 비워내는 것을 말한다. ‘내 임기 중에는 반드시 이러이러한 일을 해내야겠다’, ‘나는 후세에 길이 기억되는 위대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식의 아집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위정자로서 또는 대통령으로서 역사에 길이 남는 공적을 남기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문제는 그런 강박관념에 지나치게 사로잡히다 보면 그런 생각 때문에 오히려 국가를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라는 거대 집단은 하나의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물체와 같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물을 잘 기르고 이끌려면 그 생물 자체의 욕구와 내재 원리에 따라 그것에 합당한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 그런데 위정자 개인의 공명심 또는 무리한 정치적 야심에 사로잡힌 채 국가 경영에 임하다 보면 국가를 위한다는 행위가 오히려 국가를 망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노자는 말한다. “천하는 신묘한 것이니 억지로 도모할 수 없다. 인위로 행하는 자는 망치고 잡고자 하는 자는 놓친다.
- 도에 힘쓰는 사람은 날마다 덜어낸다

‘수중守中’을 말한다. 여기서의 ‘중’은 앞서 언급된 천지 및 풀무와 연결된다. 앞서 천지 사이가 텅 비어 있으므로 온갖 사물들이 생겨나올 수 있고, 풀무가 비어 있음으로 인해 끊임없이 바람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천지자연의 모습을 본받아 인간 특히 국가 경영을 맡은 위정자는 말을 많이 하지 말고 고요히 내면의 빔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본질이 ‘허’이기에 인간 특히 세상을 다스리는 위정자는 ‘빔’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말이 많다는 것은 생각이 많다는 것이고, 생각이 많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이 온갖 잡다한 정보로 가득 차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가득 차 있으면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다 보면 자연히 실수가 있게 마련이다. 때문에 노자는 ‘수중守中’ 즉 내면을 텅 비우라고 충고한다.
요컨대, 이 장에서는 ‘허’ 즉 빔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마하가섭이 부처님의 꽃에서 ‘허공’을 보았듯이) 천지자연이 무심할 수 있는 것은 빔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고, 이러한 빔을 유지하면 그 작용이 무궁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위정자 역시 이러한 천지자연을 본받아 ‘수중守中’할 때 무궁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 천지는 빔()을 바탕으로 삼는다

산이 높을수록 계곡은 깊다.

사람들은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쳐다보지만 노자는 텅 빈 계곡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산 정상을 향해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갈 때 노자는 계곡의 시원한 그늘에서 한가로이 노닌다. 사람들이 산꼭대기에서 호들갑을 떨며 “야호! 야호!” 하고 외칠 때 노자는

계곡의 자궁에 들어앉아 조용히 침묵으로 응답한다.

 

금강산의 일만이천 봉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무수한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파여 있는 깊은 계곡들 때문이 아니겠는가? 계곡들이 짙은 그늘을 머금은 채 깊이 파이면 파일수록 봉우리들은 더욱더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뽐낸다. 하늘을 향해 도도하게 머리를 쳐든 채 우뚝우뚝 불끈불끈 힘자랑 한다. 그러나 그 바닥에는 침묵하는 계곡들이 엎드려 있다. 그늘에 파묻힌 계곡은 자신을 텅 비운 채 천만 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한결같은 자세로 낮게 낮게 머물러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모습은 더욱더 낮아지고 깊이 패여 간다. 그늘 속에서 낮음을 지향하는 것, 이것이 계곡의 미덕이다. 노자는 이러한 계곡의 미덕을 통해 도의 오묘한 모습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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