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안성 - 칠장사

레이지 데이지 2009. 10. 4. 22:09

 

 

칠장사

요즘 항간에 널린 읽히고 있는 임꺽정 소설에서 7권에 나오는 꺽정이,

7권에서는 청석골에 관원들이 들이닥친다. 

이 낌새를 채고, 청석골 사람들이 다 흩어져 피한다.

꺽정이는 한첨지라는 사람에게로 가 그의 오입쟁이 아들에게 검술을 가르쳐주며,  서울살이를 시작하며서 은신하게 된다.

 

그러면서... 소흥이라는 기생과 눈이 맞아 놀아나고...

부인 셋과 동시에 살림 한다.  그 사연이 또 웃기다.

망한 양반집 딸, 박씨를 빚 해결을 해주고 데리고 살고,

정승집 딸, 원씨는 보쌈 당해 죽은 총각아이 원수 갚아 준다고 잡아와서는 ...

그것도 자기 꼬붕에게 넘겨 줄것 이라고 하고는 살림을 산다.

원씨와 사는 살림집 옆에 아주 성질 지랄맞은 과부가 있었는데,

하도 하녀를 학대하니 이 하녀를 빼돌렸다.

이 과부가 와서 매일 행패를 부리니, 환도를 가지고 밤에 죽이려고 들어간다.

죽이라고 대어들며 옷을 벗으니, 죽일 생각 대신 딴 생각을 품고 그 여자와 무슨 약조를 하고 살림을 시작한다. 이른바 계약결혼 같은 것이라 할까...

덕분에 그 과부는 아주 착한 여자가 되었다지만,

밤마다 담을 넘어 이웃집으로 가는 남편을 보는 원씨는 어땠을까?

빚 때문에 꺽정이랑 사는 박씨는 아이를 유산하고 몸이 아픈데도

꺽정이는 기생까지 네 집을 돌아다니며 재미를 본다.

 

청석골 사람들이 다시 모여 꺽정이 오기를 간청한다. 

꺽정이 처남 황청왕동이가 몇번이고 꺽정이에게 돌아갈 것을 청하러 왔다가

꺽정이가 세 여자와 살림을 차린 것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꺽정이에게 빰까지 얻어 맞고, 청석골로 돌아가 이 사실을 자기 누이와 사람들에게 알린다.

 

남편의 꼬라지를 안 꺽정이 부인이 아들과 함께 서울로 온다.

거기서 남편과 만나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꺽정이는 '이년 저년' 하며 오히려 욕지거리를 하고

부인을 얼마나 때렸는지, 다리도 부러지고, 피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같이 온 의형제들이 설득하여 어찌어찌 청석골에 다시 들어가지만,

가서 처음으로 하는 짓이라는 것이...

꺽정이가 분명 여자가 생겼을것이라고 말한 책사 '서림'을 죽이려 하고,

자기 망신을 주었다고 처남의 목을 치라고 명한다.  군명을 어겼다나...어쩠다나...의형제들이 서로 자기 먼저 죽이라고 해서 살긴 했지만...

 

여기까지의 처세로 보면, 이건 내가 어릴 때 시골에서 많이 봤던 무식한

시골아저씨들의 행태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다.

도둑질한 재물로 일도 안하고 매일 재미 보면서 살고,

자신의 잘못을 일깨우는 의형제들을 죽이려 하고...

 

난 그가 왜 영웅 대접을 받는지 이해가 안 간다.

통째로 나무를 뽑는 힘을 가졌다고 영웅이라고 하는 것인가?

 

암튼, 도대체 이 인간이 왜 영웅인지 이해가 안 간다.

내가 볼때는 형편없는 무식한 잡놈의 자식일뿐...

 ....

 

이 글을 열심히 읽었더니 ...것도 아니고 마침 칠장사에 갈 일이 생겼다.

 

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한전 앞에서 같이 간 동행에게 기억을 더듬어 열심히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불목하니 아주머니가 대박에 엄청 큰 소리로 조용하라고 면박을 준다.

깜짝 놀라고 민망하여 두리번거리니 우리가 얘기하고 있을 때 마침 한 스님이 나한전 뒤에서  기계로 풀을 깍고 계셨던

것이었다. 근데 그 기계소리가 끊기니...우리 말소리만 크게 들렸던 모양이다. 난 모 그러군 하는 마음인데...

같이 간, 같이 수다를 떨던 동행은 기분을 몹시 언짢아 한다.

아마도 사회적 지위때문에 민망하고 속상햇던 모양이다.

 

칠장사는

선덕여왕 5년(636)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이곳 칠장사에는 서기 857년부터 10년간 궁예가 유년시절을 보내면

활 쏘는 법을 익혔다는 전설이 있고,

서기 1540년경에 임꺽정이 이곳 칠장사에 계신 갓바치 출신

노승 병해대사의 제자가 되어 정신교육과 무술을 익혔다는 이야기가

벽초 홍명희 장편소설 임꺽정전에 실려 있고

현재 칠장사에는 꺽정불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곳에서 수도하고 입적한 고려 때 고승 혜소국사가 현재 비각이 있는 자리에 홍제관이라는 수행처를 세웠고, 현종 5년(1014) 크게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칠장사는 예로부터 깊은 차령산맥이 그 줄기를 품고 있어 고려 말 왜적의 침입이 잦을 때 사서를 칠장사로 옮겨 8년간 비장해 소실을 면한 일이 있다.

칠장사는 손때가 묻지 않아 찬찬히 살펴봐야 할 보물들이 많다.

칠장사 일주문 전방 700m 지점에 전국에 몇 개 없는 철 당간이 서있고,

진흙소조로 만든 사천왕상이 찾는 이들을 압도한다. 

 

 

칠장사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 조금 올라오면 칠장사가 보이는데

맑은 하늘, 구름 ,산의 푸름을 배경으로 한 칠상사 풍경은 한 장의 그림 같이

느껴졌다

 

사천왕문

 조선 영조 1년인 서기 1725년에 세운 유형문화재로 이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으로

비유되는 사찰 경내가 보인다.

 

대웅전

칠장사의 역사는 1371년이 지나는 동안 몇 차례 중창을 거듭하여 지금 있는

이 법당은 서기 1703년 숙종 29년에 탄명 스님이지의신 것으로

304년 되었습니다. 건축양식은 맞배지붕에 다공포 양식으로 기둥과 기둥사이에 공포가

두개씩 돌출되어 있으며 전면 삼간 측면 작게 삼간으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법당으로 조선조 후기 건축양식에 큰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칠장사의 묘미는 빛바랜 단청과 고색창연한 대웅전이다.

새것을 덧씌우는 것만이 아름다움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칠상사 대웅전을 보면 알수 있다.

오랜 풍상을 겪어 단청의 문양은 세월에 날려 보냈지만 힘있게 뻗은 추녀에서

근엄한 자태가 배어나온다.

 

홍제관 

홍제관은 서기 약 800년 전에 혜소국사를 기념하여 건축하였던 것을 8년 전에

다시 복원하여 그 안에 ‘인목대비친필족자’와 임꺽정이 조성하였다는 꺽정불 등

귀중한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는데 평상시엔 볼 수가 없고 절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국보인 오불회개불탱은 1년에 한번정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칠장사에는 괘불 두 점이 있는데 그 하나가 국보 296호로 지정된 오불회쾌불탱이고,

또 하나는 보물 1256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불회괘불탱이라고 한다.

오불회괘불탱은 조선조 14대왕 선조의 원자인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가 서기 1628년에 이 곳 칠장사에 하사하신 아주 귀중한 괘불로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괘불 중 세 번째로 오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중림리 3층석탑 

죽산에 흩어져 있던 탑부재를 죽림리 강성원 목장에서 관리하여오다

강성원 선생의 기증으로 2005년 11월 28일 현재위치로 이전 설치하였다.

탑 전체 높이는 375m이고 상대갑석은 하나의 판석에

옥신괴임을 2단으로 하여 둥글게 처리하였다.

1층 탑신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한 면은 둥근 문고리를 조각 하였으며

탑신마다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부의 체감비율이나 옥게 받침 등으로 미루어 볼때 고려전지에

제작 된 것으로 추정 된다.

 

봉업사 석불입상

불상은 두광 아래로 발께까지 신광이 표현되어 있고, 큼직한 꽃무늬 대좌 위에 모셔져 있다. 불상에 비해 대좌는 풍상의 흔적이 적은 깨끗한 화강암이다.

불상은 특히 얼굴의 눈ㆍ코 부분이 마모가 심하지만 불상을 빚은 조각 솜씨는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다. 오른손을 들어 살포시 가슴에 얹고,

왼손은 차분히 내려 무릎 아래로 늘어진 옷자락을 잡고 있는데 그 자태가 일품이다.

어깨에 걸쳐 가슴을 타고 내린 얇은 법의의 선, 3기의 화볼을 인 두광, 그 뒤로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광대의 조각 솜씨가 그 시대의 정성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화려한 조각솜씨를 미루어 보면 8세기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우수한 수작으로 평가

받는다고 한다.

 

 

 칠장사 혜소국사비

보물 488호로 지정된 혜소국사비는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탑비와 9층의 부도탑이 있었다고 하며

서기 1694년 이절이 불타고 파괴될 때 없어졌다고 한다.

우선 비를 설명하면 비신을 바치는 거북 모양의 귀부가 있고,

그 옆에 높이 248cm, 넓이 128cm, 두께 20cm의 비신이 서있으며,

비신 반대쪽에 있는 것이 이수라 하여 비신위 덮게 역할을 하였는데

구름사이로 두 마리의 용이 노닐고 있는 모양이 새겨져있다고 한다.

귀부 위에 탑신이 서고, 탑신위에 이수가 올라가 높이 4m나 되는

엄청난 크기의 비석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보물 488호인 칠장사 혜소국사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비각 안에 안치되어 있으나 훼손되어서 인지 귀부와 비 그리고 머릿돌이 따로 따로 놓여 있습니다. 비몸은 한 가운데가 대각선으로 잘려져 있어서 붙여 놓은 상태이며, 비몸의 양쪽 측면에는 용이 살아 옴직이는 듯 정교하게 새겨 놓았습니다

 

 

나한전-

지금은 새로 증축중인지 비닐아우스인양 그 속에 들어있다.

혜소 국사비 앞에 자리한 일곱현인의 화신을 봉안한 나한전은 어사 박문수가 기도 드리고 장원급제를 한곳으로 유명 하단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조청으로 만든 유과를 이곳 나한전에 공양하고 갔던 박문수의 꿈에 과거시험의 시제가 그대로 나와 급제했다고 전한다. 박문수는 돌아 올때도 과자를 만들어 다시 이곳에 받치고 갔다 하는데 현재도 이 나한전에는 수험생 자녀를 둔 부모가 와서 과자 공양을 하면 영험 하다 하여 입시때가되면 과자공양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칠장사 나옹송 

나한전 뒷편에 있는 이 소나무는 나옹스님이 심었다는 설화가 전해내려온다.

높이 8m둘레 2.1m 둘레인 나옹송은 1997년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 되었다고 한다..

 

 

칠장사 당간 

우리나라에서 세 개밖에 없는 철당간지주

하나는 청주에 있으며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또 하나는 공주 갑사에 있는데 이것은 보물로 지정,칠장사에 철 당간 지주는 제조연대가 확실치 않아서,  유형 문화재 34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절에서 부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깃발 등 각색 깃발을 게양하던 것으로 대개 절 입구에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