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詩의 翅

문정희

레이지 데이지 2013. 10. 11. 09:14

 

목숨의 노래  / 문정희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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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친구는 당신을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당신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당신은 그것이 정당한 근거인가, 합리적인 기준인가를 알기 위해 당신의 이성을 이용해 조사하고 분석합니다.
이런 식으로 분석하면서 당신은 한 사람을 친구라 부르고 다른 사람을 적이라 부르며
세 번째 사람에 대해 무관심한 이유와 근거가 영구적인 조건이 아니며
어느 순간에든 변할 수 있는 일시적인 것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친구가 당신에게 해를 입혀 적이 될 수도 있으며,
적이 당신에게 친절함을 보여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낯선 사람이 미래에 친구나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명상할 때 당신은 그들 사이에 차별을 두고 심한 감정의 차이를 느낄 정당한 근거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친구’, ‘적’, ‘낯선 사람’이라는 호칭이나 이름표들은 덧없는 것이며 어느 때든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달라이라마 당신은 행복한가 中에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참으로 덧없고,

그러한 덧없다는 느낌조차도 항상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인간의 몸을 받아 사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조건지어짐에 따라서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살면서 터득한 나름의 방편으로 호저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不可近 不可遠)
오면 오는대로 가면 가는대로(如來如去)
인연을 따르되 탐착하지는 않는다.(隨緣無着)”는 원칙을 가지고는 살지만,
불현듯 만나는 폭류같은 흐름을 어찌 피할 수 있을런지요?

때로는 스스로 자초하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날아드는 화살을 맞고 고통스러울 때,
그 고통의 폭류 속에서 만나는 가냘픈 구원의 손길,
따뜻한 말 한 마디,
어깨를 감싸주는 격려,
말없이 끄덕여주는 무언의 동조,
그것은 ‘친구’라 불리우는 든든한 동앗줄이 아닐까요?

평상시에는 그저 편안히 지켜보다가
힘들고 어려울 때 모른 척 손 내밀어 당기고 밀어주는
그런 친구 하나 있으면
더 바랄게 있을까요?

 


 아름다운 곳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딘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발 같은 벚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


시인 문정희님은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9년에 《월간문학》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문정희 시집》, 《새떼》, 《찔레》,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 수필집 《지상에 머무는 동안》 등을 출간했다.

 

1947년생 보성출신 여류시인, 동국대 석좌교수

 

 

 

 

가을의 남자.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 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를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별,꽃,잎,산,옷,밥,집,땅,피,몸,물,불,꿈,섬 그리고 너,나 이미 한 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 날 

 

길            

손을 잡자, 그대여 

처음엔 시계처럼 두근거리며 다가서던 너. 

 

그런데 어짜자고 서른도 막바지에 

여기 날 세워 놓고 

새끼들까지 주르르 매달아 놓고 

이렇게 뒷발길로 차버리는 거냐?

 

 

 

남행열차를 타고 가며                              

 


 갈라진 논바닥에서 

힘줄 선 아버지의 다리를 본다. 

바람이 이우는 산모롱이쯤에선 

흰 수건 쓰고 땅에 엎디인 어머니를 만난다. 

 

저 쌀과 저 콩들이 나를 키웠다. 

그러나 

아직도 쭉정이 비린 콩내 가득한 말[言]밖에 가진 것이 없는 나는 무엇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감추어진 힘줄,

부드러운 흰 손으로 나는 누구를 만날 것인가.

 

 두근거리며

두근거리며 끝없이

남행열차를 타고 간다.

 

 

가을비

            

어제 우리가 함께 사랑하던 자리에

오늘 가을비가 내립니다 .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함께 서서 바라보던 숲에

잎들이 지고 있습니다 .

 

어제 우리 사랑하고

오늘 낙엽 지는 자리에 남아 그리워하다

내일 이 자리를 뜨고 나면 바람만이 불겠지요

 

바람이 부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헤어져 그리워하며

한 세상을 살다 가겠지요.

 





<치 마>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는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하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드려고 애를 쓴다

 

치마 속에 무언가 확실히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팬 티>

       - 임 보 -

         본명은 강홍기 1940년생 순천출신으로 전 충북대 교수...

         이 시는 <치마>에 대한 답시...

 

 

그렇구나

여자들의 치마 속에 감춰진

대리석 기둥의

그 은밀한 신전

 

남자들은 황홀한

밀교의 광신도들처럼

 

그 주변을 맴돌며

한평생 참배의 기회를 엿본다

 

여자들이 가꾸는

풍요한 갯벌의 궁전

 

그 남성 금지구역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붙들리면

 

옷이 다 벗겨진 채

무릎이 꿇려

천 번의 경배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곤욕이 무슨 소용이리

 

때가 되면 목숨을 걸고

모천으로 기어오르는 연어들처럼

 

남자들도 그들이 태어났던

모천의 성지를 찾아

때가 되면 밤마다

깃발을 세우고 순교를 꿈꾼다

 

그러나, 여자들이여,

상상해 보라

 

참배객이 끊긴, 닫힌 신전의

문은 얼마나 적막한가!

 

그 깊고도 오묘한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를

남자들이 지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며
숨죽여 홀로 운 것도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몰라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으면
당신을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입술을 열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마지막처럼 고백한 적이 있다면……


한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을 두려워하며
꽃 속에 박힌 까아만 죽음을 비로소 알며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의 심장이 뛰는 것을
당신께 고백한 적이 있다면……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처음으로
절박하게 허공을 두드리며
사랑한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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