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詩의 翅

<퍼옴>오규원- 사랑엔 길이 있다네...無法

레이지 데이지 2014. 7. 24. 14:53

사랑엔 길만 있다네.....
- 원효에 비추어 본 오규원

조성택 선생이 좌장으로 있는 '시민행성'의 강좌 홍보 포스터 좌상단에 있는 글귀는 고

오규원 시인의 시 '無法'에서 따온 것이다.

 

 '사랑에는 길만 있고 법은 없네'라는 이 글귀는, 이 공간을 열자마자 닥친 세월호 참극의 슬픔과 고통에 함께하자는 취지의 '인문적 성찰 기간' 중 슬로건으로 활용된 것이다.

 

좌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어제 처음 가 본 공간은 좌장의 취향을 반영한 듯 반듯하면서도 파격이 있고 또 우아했다.

...

오규원의 그 싯귀는 그 공간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첫 단추가 되었다.

사랑, 길 그리고 법이라는 고도로 추상화된 개념 덩어리들이 몸과 맘을 휘젓고 다녔다.

이날 함께 읽은 원효선사의 <열반경종요>의 내용조차 내 몸과 마음을 사로잡은 바로 이 세 단어의 위치를 조정하고, 이 세 단어들을 실상과 연계하여 온 몸으로 받아들이게 혹은 사무치게하는 배경일 뿐이었다.

 

길과 법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오규원의 이 싯구는. Love is not method but only way. 이렇게 하면 이 시가 좀더 명료하게 들어 올까. 좌장에게 이 시의 의미를 물었을 때, 그도 뭐 뚜렷한 답변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이해하는 '법'이란 국회의원이 만든 법 혹은 불가에서 말하는 법이 아니라 '방법'으로 이해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랑이란 그저 길가듯 하는 것이지 어떤 특정 방법이 있어 그 방법을 따라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렸다.

 

원효선사는 열반경종요를 시작하며 이렇게 말한다. '근원을 살펴 보니, 열반에 이르는 길이 무르익어 가는 데에는 방법이 없으나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 머무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규원의 시귀만큼이나 알쏭달쏭하긴 마찬가다. 세 시간이 넘게 이 문장 하나 건지려 갑론을박을 한 셈이니, 저리 해석한 것도 나의 자의적인 해석일뿐이니 이 해석을 불한당 멤버들에게 제출했을 때 분분하리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열반을 사랑으로 바꿔놓으면 어떨까. 오규원이 이 발언을 이렇게도 볼 수 있는 거 아니냐는 거다, 원료에 비췬 오규원인 셈이다. 사랑이 무르익어가는 데에는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꼭 그 방법이 없다고만은 할 수 없는데 사랑이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고 흔히 말하긴 하지만 또 어떨 땐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규원이 사랑은 (방)법이 아니고 길이라고 했을 때의 의미는 이거 아닐까.

길이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아니 애초부터 길이란 없다.

인간들이 자주 다니다 보니 길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사랑이란 늘 전대미문의 사건이어서 남이 만들어 놓은 길이란 쓸모없을 때가 많다.

그렇다면 오규원에게 있어 (방)법은 남이 내어놓은 길, 그가 길이라고 했을 때엔 전인미답이어서 내가 스스로 내어야하는 길을 말하는 거 아닐까. 그러니 그 길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또 머무르기도 하고 머무르지 아니하기도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어제 들은 말 중에 가슴에 훅 꽂혀 남아 있은 말, '회광반조', 回光返照 '빛을 돌려 거꾸로 비추어 보라' 이 말의 뜻은 다음 링크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http://goo.gl/N5vWnE 어디로 향하는 빛을 어디로 돌리라는 말인가, 남을 향한 외부로 형하던 빛을 내 안으로 되돌려 비추라는 말이다. 원효선사로 향하던 빛을 내 안으로 비추라는 말이다.

오규원의 시가 내 맘과 몸을 사로 잡을 때, 원효를 거쳐 내 몸과 맘에 남아 있는 오규원을 비출 때 비로소 오규원의 말 뒤에 숨은 의미가 드러나는 경험을 한다.

 

도법스님은 이 '회광반조'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서산대사의 제자로 알려진 청매선사의 <십무익송>을 소개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이것이다. “心不返照 看經無益 자신의 마음을 반조하지않으면 경전을 읽어도 이익이 없다.” http://goo.gl/iliGw4 경전을 읽되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야 한다는 거다. 오규원의 시가 내게 준 선물이다. 아니, 여기 '시민행성/화쟁아카데미'의 성찰적 인문 주간을 선정하고 이 슬로건을 채택한 좌장과 그 스탭들이 준 선물이다. 돌아간 아이들이 남긴 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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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法

사람이 할 만한 일 가운데
그래도 정말 할 만한 일은
사람 사랑하는 일이다

-이런 말을 하는 시인의 표정은
진지해야 한다

사랑하는 길만 있고
법은 없네

-이런 말을 하는 시인의 표정은
상당한 정도 진지해야 한다

사랑에는 길만 있고
법은 없네

(오규원·시인, 1941-2007)

 시 출처: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http://goo.gl/41qP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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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도법스님이 이야기 도중 쓰신 판서들. 맨 왼쪽은 열반사덕, 가운데는 제일 먼저 쓰신 건데 맥락이 안 떠오르고, 오른쪽은 '열반'에 관해 말씀하시며 쓰신 글. 생멸이 멸해진 상태 고요하고 또 고요하면 즐거움이 있다고, 욕망의 불길이 사라진 상태가 바로 열반적정이다. 해르만 헤세가 <싯타르타>에서 묘사한 바, 열반적정은 저 언덕도 이 언덕도 아닌 아수라 지금-여기의 삶이라는 것. 그 삶안에는 열반사덕이 모두 작동하고 그것이 실상이라는 것..

 

....페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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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서나

                / 오규원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앉으면 중심이 다시 잡힌다.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일어서기 위해 앉는다.

만나기 위해서도 앉고 협잡을 위해서도 앉고

의자 위에도 앉고 책상 옆에도 앉듯

역사의 밑바닥에도 앉는다.

가볍게도 앉고 무겁게도 앉고

청탁불문 장소불문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밑을 보기 위해서도 앉고

바닥을 보기 위해서도 앉는다.

바로 보기 위해 어깨를 낮추듯

 

 - 시집『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문학과 지성사,1987)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속에서 자 본다.

 

시인이 7년여 전, 그러니까 타계하기 며칠 전에 병문안 온 지인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썼다는 그의 유작이다. 시인의 시는 곧장 유언이 되어 강화도 전등사의 배롱나무 아래 잠들었다.

 

오규원 시인의 시는 그렇듯 시가 드러낸 것 이상의 감동과 여운을 주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어디서나’를 읽으면서도 감춰진 시 너머의 의미를 찾기에 잠시 골똘해졌다.  

의자에 머문 시인의 시선에서 '바로 보기 위해 어깨를 낮추듯'이란 지혜를 발견한다. 쉽게 읽히다가 '역사의 밑바닥에도 앉는다'는 대목에 탁 걸리는데 마지막 연과 연결시켜보면 어렵잖게 답이 나온다. 역사를 바로보기 위해선 어깨를 낮추고 얹힌 힘도 빼고 밑바닥도 챙겨보기를 권한다. 의자에 앉듯 무게의 중심과 균형을 잡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사회 각 분야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할 위치에 있는 고위직공무원의 올바른 역사관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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