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체로금풍...진전사지

레이지 데이지 2015. 6. 14. 09:09

 

 

 

 

 진전사지 삼층석탑 (陳田寺址三層石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진전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제 3층석탑.
국보 제122호.
통일신라탑의 기본적인 형태로 기단에 비천상과 팔부신중을 조각하고, 1층 몸돌에는 사방불을 조각하였다.

지정종목 국보지정번호 국보 제122호지정일 1966년 02월 28일소재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100-2 지도시대 통일신라종류/분류 석탑크기 높이 5m

1966년 2월 28일 국보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5m이다. 진전사의 옛터에 서 있는 삼층 석탑으로 통일신라 8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진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8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도의(道義)가 당나라로 유학갔다가 821년(헌덕왕 13) 귀국하여 오랫동안 은거하던 곳이다. 터 주변에서 '진전(陳田)'이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탑은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 놓은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천의 자락을 흩날리는 비천상(飛天像)이 사방으로 각각 둘씩 모두 여덟이 양각되었고,  위층 기단에는 구름위에 앉아 무기를 들고 있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사방에 둘씩 양각되었다. 1층 탑신에는 사방불(四方佛) 각 면마다 양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3층 상륜부(相輪部)에는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지고 노반(露盤)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의 정교함과 기품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화려하거나 장식적이지 않고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잡혀 있으면서 지붕돌 네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경쾌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기단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과 탑신의 세련된 불상 조각은 진전사의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불국사 삼층석탑의 장중함이 이 탑에서는 아담함으로 바뀌었으며, 불국사 삼층석탑이 중대 신라 중앙 귀족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이 탑은 지방 호족의 새로운 문화 능력을 과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박황재형선생

산채 "취산몽해" 다녀오다. 치래산방이라든가...

 

선생은 본채 취산몽해를 큰누님에게 그대로 주고

체로금풍이라는 사랑채를 완성했다.

 

그리고

폐사지 진전사지 답사 갔다.

 

가기전에 공부했다.

아는만큼 보인다.  알고싶으면 마음이 절실한만큼 그만큼 더 보인다.

 

신수는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맑은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갈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고 점수의 배움을

혜능은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아니고

맑은 거울의 받침대도 아니다.

깨달음은 상에대한 집착이 없는것이니

어느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을리오....라고 돈오가르침을 했다가 이를 당나라 유학가서

마조도일의 경주에서, 즉 중앙에서의 축출당함.


그 역시 확실하지 않은 문화에 충격받은 기존 골품 세력에 밀려났을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해서 금강산가다가...

전진사를 신축.하고 신라의아이콘 3층석탑을 본당앞에 세웠을것이다.

배산임수로 뒤는 설악산이요...앞으로는 동해앞바다로 좌청룡 우백호

 

폐사의 원인는 뭘까...

절집 4물의 의미를 파악하고 절집보물을 잘 아는 자는 누구냐...

절집에서 도둑질하는놈이 누구나? 그들 스스로아니럴지 

 

옛말에 불가 살이란 쇠...청동을 털어내어서 무기를 짓고 ...산적이나 도적...왜적의수탈...기존정부의 무능...

그래서 진전사가 망했다는데. 아니 그 어려운 조선시대조차 남아있었는데..적은 모든지 내부에 있다는생각이다.

 

목어 운판 종...그들은 절앞의 만년저수지에 던져졌다고하는 이 가뭄에도 물은 시퍼렇게 고여있다.

 

3층석탑은 밭갈다가 돌덩이에 부처님이 새겨져 있어 발굴하다보니 무너진 탑무더기였다. 그래서 서둘러 조립하여 서울로 이송하려 하였으나 주위의 반대가 심하여 당시 70년대초 정부는 부랴부랴 밭을 매입하고 그 자리에 세워놓았고 지금도 그 아름다움과 앙징맞고 귀염을받는다. 그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