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문경 봉암사 개방

레이지 데이지 2016. 5. 6. 00:48

 

 

 

 

 

 

 

 

 

 

 

대한불교 조계종은 1982년 봉암사를 특별수도원으로 정해 연중 부처님오신날 하루만 일반인에게 개방해왔다.

 

올해는 5월1일부터 8일까지 인원제한으로 임시개방을 한단다.

1년에 하루만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사찰인 경북 문경 봉암사가 문경전통찻사발축제 기간에 맞추어 추가로 개방했다니....

 

이유는 문경도자기찻사발축제와 더불어 1일 300명 예정했으나 홍보미숙으로 총450 남짓 되었다 한다. 1년에 하루만 개방하는 문경 봉암사가 무슨 마음이었나 싶다.

 

문경시, 찻사발축제추진위원회, 봉암사는 협의를 거쳐 1일부터 축제 관람객이 봉암사에 다녀갈 수 있도록 임시로 개방했다.

봉암사는 축제 마지막 날인 8일까지 산문을 연다.

 

부처님오신날에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리다가 보니 매년 교통난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문경시와 축제추진위는 찻사발축제를 활성화하고자 봉암사의 협조를 받아 축제기간에 봉암사를 개방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몰리는 것을 막고자 미리 신청하는 조건으로 하루 관람 인원을 300명으로 제한했다.

 

관람 시간도 오전 11시부터 1시간으로 제한했다.

 

봉암사는 통일신라시대 지증대사가 창건한 절로

국보 315호인 지증대사탑비,

보물 1천574호인 극락전,

보물 169호인 삼층석탑 등 국보 1점, 보물 6점 등의 문화재가 있다.

 

1947년 10월부터 3년 간 성철, 청담, 자운 등 30여 명의 승려가 일제하에서 흐트러진 불교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수행 결사했던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또 봉암사가 자리 잡은 희양산은 백두대간을 이루는 산으로 바위 봉우리를 비롯해 백운대계곡이 있어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역사문화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평소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다가 보니 봉암사는 가고 싶어도 쉽게 갈 수 없는 특별한 장소가 됐다.

 

 

<희양산> 996 m 충북 괴산군 연풍면

경북 문경시 가은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는 희양산은 문경새재에서 속리산 쪽으로 흐르는 백두대간의 줄기에 우뚝 솟은 암봉이다.희양산은 그 모습이 우뚝하고 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처럼 보이는 데다 바위 낭떠러지들이 하얗게 드러나있어 주변의 산에서 뿐만 아니라 먼 산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산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장쾌하고 아름답다. 봉암사가 자리한 봉암용곡 너머로는 대야산, 속리산 줄기가 거센 파도인 듯 날카롭게 솟아있다.봉암사 위의 백운곡은 무성한 숲속에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으로 시원한 계류가 넓은 암반을 흐르고, 기암괴석, 폭포, 옥석대 바위에 있는 마애불좌상, 백운대 등이 절경이다.

 

산의 남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5년(879년)에 지증대사가 창건했다 하며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였다고 한다. 봉암사를 창건한 신라 헌강왕 때의 고승 지증대사는 전국 명산을 둘러본 뒤 이곳에 와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 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고 지세를 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 년에 한 번 초파일에 산문을 개방하는

선문구산의 하나인 희양산문 봉암사...그곳을 간다. 갔다.

 

봉암사에는

1. 지증대사적조탑비, 2. 지증대사적조탑,

3. 원오탑비, 4. 정진대원오탑,

5. 삼층석탑,

6. 함허당득통지탑,

7. 환적당지경지탑,

8. 상봉대선사비,

9. 노주석,

10. 백운대,

11. 마애불좌상 등이 있다.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번지, 희양산 자락에 있는 봉암사는 신라 선문 구산의 하나로 희양산파의 종찰로서 신라 헌강왕 5년(879)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지선(지증대사)이 창건한 절이며 현재 까지 선도량으로 일관해온 선찰(禪刹)이다 .

 

봉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 말사이며, 881년에 나라에서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오늘 이제나저제나 하고 마냥 마음으로 만 달려갔던 희양산문 봉암사를 다녀왔다. 그동안 글과 사진을 통해서 접하면서 언제 한 번 가보나 했었다. 1982년부터인가 수행 전문 도량으로 바뀌면서 일 년에 한 번 부처님오신날 만 개방한다는 원칙이 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1.

​ 曦陽山 鳳巖寺희양산봉암사 일주문이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길이 두 개가 있는데 지금은 이길보다 새로 난 길이 주 통행로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 길은 일주문 때문에 자동차가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절집의 길들이 새롭게 만들어진 길이 적지 않다.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닌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 기분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계곡 군데군데 낙차가 있어 물소리가 우렁차다. 생각 없이 가다 보니 나 역시도 옛길이 아닌 차로 인해 만들어진 길을 가고 있었다.

 

​ ​옛 길을 걸으면 자연스럽게 樓루를 지나게 되는데 새로운 길로 오면 이곳은 영 어색한 건물이 된다. 南薰(?)樓 우리나라 사찰이나 서원에 루가 적지 않은데 이러한 기괴한 모양을 한 루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새롭게 지은 건물인데 한국의 누각의 모습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내가 느낌에는 왠지 중국풍의 냄새가 짙게 느껴진다.

 

수행도량의 가풍을 생각하면서 건물을 지었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유홍준교수의 『우리문화유산답사기1』에 강우방 교수와의 대화 내용이 있는데 이는 그때보다도 더 심한 경우인 것 같다.

 

2.

먼저 극락전부터 찾았다. 보물15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다른 전각들은 모두 불타고 이 건물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정면에서 본 모습으로 각 면이 한 칸인데 바깥 기둥은 삼 칸인 정사각형 건물이다.

 

대웅보전 방향에서 바라본 극락전으로 2층의 모습이며 지붕이 사모지붕으로 독특한 모습이다.

 

평면이 정방형인 이러한 건축은 처음 목탑지였던 자리에 기단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건물로 보고 있다.

 

후백제를 세워 왕건과 겨뤘던 견훤이 문경 가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예전에 직장 선배가 가은으로 장가들었는데 가은에서 견훤을 욕하면 싫어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에 쫓겨 봉암사에 머물 때 이 건물을 피난처로 삼았다고 전한다. 견훤은 결국 민심에 반하는 행동으로 왕건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지붕 위에 석조물이 특이하다. 절병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건축물에 남아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기억에는 금산사 대장전과 법주사 원통보전, 창덕궁 후원에 있는 정자에서 볼 수 있다.

 

극락전 옆에 있는 산신각으로 한 칸 짜리 건물로 간결해 보인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대웅보전으로 꽤 크고 웅장하게 보인다. 정면 일곱 칸이니 흔치 않은 규모다. 법당 안에 이삼백 명은 족히 들어앉을 수 있는 것 같다.

 

​ ​『우리문화유산답사기1』를 보면 대웅전이 있었던 자리다. 유홍준 교수는 대웅전 기단석의 낙숫물 받이를 특별히 다루어 찾아보았는데 아마도 이 건물을 다시 지으면서 없어진 것 같다. 소소한 부분에 지혜가 깃들어 있는데 아쉽다.

 

​희양산문을 연 지증대사의 진영과 제자 정진대사의 진영이 보셔진 조사당으로 옆에 지증대사 승탑과 탑비가 있다.

 

​봉암사 삼층석탑과 금색전 건물이다 뒤편 현판은 대웅전이다. 안에 모셔진 불상이 비로자나불이니 대적광전이나 비로전이어야 하는데.... 구산선문의 특징 중 하나가 철불을 모시고 그것도 비로자나불을 모셨던 경우가 많다. 봉암사에도 절을 창건할 때 철불을 부 분 모셨다고 한다. 두 분 중 한 분은 철조여래 좌상이었는데 반파된 것이라서 스님들이 고물로 팔아버렸다고 한다.

 

​봉암사가 산문을 일 년에 한 번 개방하는 이유가 있는 구역이다. 묘유문을 통하면 선방이 자리한 곳이다. 지금은 해제 기간이니 스님들은 운수납자가 되어 구도 행각을 떠나셨을 것이다.

 

 

 

​봉암사 선방이다.

 

봉암사가 지금의 수행도량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해방 직후 성철스님을 비롯하여 서암, 월산, 자운, 청담스님 등이 일제시대 혼탁해진 불교를 정화하기 위한 참선 결사를 단행하면서 부터다. 그 시절의 인연이 오늘의 봉암사가 수행도량이 된 초석이 되었을 것이다.

 

​ ​마애불 가는 길에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선방이다. 정면으로 팔작지붕이 조사당이고 조사당 뒤 건물이 지증대사승탑과 탑비를 보호하기 위해 새운 건물이다. 그 뒤쪽에 대웅보전과 극락전이 있다.

 

​ 희양산문을 연 지증대사의 승탑(보물 137)과 탑비(국보315호)는 2009년 국보로 승격되었다. 전각은 두 보물을 보호하기 위해 새운 건물이다.

 

 

​ 智證大師(824~882) 부도(승탑)인 적조탑은 스님이 879년 이곳 봉암사를 창건하고 882년 입적한 다음 해 새웠다.

 

​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에 하나인 지증대사 적조탑비다.四山碑銘은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보령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다.

 

승탑은 바로 세웠는데 탑비는 최치원이 893년에 지었는데 탑비가 새워진 것은 924년이니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아마도 나말의 혼란스러움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 승탑의 지대석과 기단부, 하대석은 각 면에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각기 다른 모양의 사자를 조각하였다. 중대석 괴임은 운문으로 장식하고 중대석은 각면에는 각기 다른 가릉빈가를 조각하였다. 8각의 기둥은 구름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 중대석 괴임은 대체로 복련으로 장식하는데 이곳은 운문으로 장식하고 중대석은 각면에는 각기 다른 모습의 가릉빈가를 조각하였다. 8각의 기둥은 구름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 중대석은 사리기, 공양상, 주악상 등이 새겨져 있다.

 

​ ​중대석 각 면에 안상을 파고 사리기를 조각하였다.

 

​ ​중대석 공양상의 모습 안상에는 구름 문양으로 장식을 더하였다.

 

​상대석은 앙련을 조각하고 그 위에 탑신 괴임을 놓고 탑신 밑에는 건물의 난간을 장식하였다.

 

​탑신부의 문비로 양옆에는 승탑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문비는 문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자물통으로 잠겨져 있는 모습이다. 이곳에 승탑의 주인공의 사리가 모셔져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문비는 앞뒤로 있고 좌우에 사천왕상이 그리고 나머지 면에는 보살상 2구가 새겨져 있다.

​ 왼쪽부터 문비, 사천왕상, 보살상이다.

 

​ ​옥개석의 지붕골의 모습이다. 두 면이 파손된 모습이다. 예전의 사진에 비해 복원된 모습이다.

 

​ ​옥개석의 귀꽃의 모습, 화사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 ​상륜부의 모습으로 노반과 복발, 보륜, 보개, 보주가 잘 남아있다.

 

​지증대사는 선문을 개창한 스님들이 거의 당나라 유학승 들이었는데 지증은 유학을 하지 않은 스님이었다. 또한 거의 육조 혜능 남종선의 법을 이었는데 희양산문은 신수의 북종선의 법을 이은 사찰이었다.

 

도의는 진전사에 기거하면서 선법을 가지산 보림사 보조 체칭에게 전해지는데, 이곳 희양산문은 7세기 중엽 법랑스님의 선기에 의해 세월이 흘러 고손자 되는 지증대사에 의해 선문을 개창하게 되었다.

 

​龜趺귀부의 모습, 입과 코 부분에 상처가 남아 있다. 다른 탑비에 비해 머리 부분의 갈귀가 높이 솟은 모습이다.

 

​ ​탑비의 비문은 최치원이 짓고 글은 "분황사 스님 혜강이 83세에 쓰고 새겼다"라고 비문 끝부분에 남아있다. 83세에 글을 쓰는 것이야 어럽지 않겠지만 새기는 것까지 하셨다면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귀부의 옆모습과 귀갑, 비좌의 모습이다.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거북의 등과 발이 또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 螭首의 모습으로 앙련과 용이 조각되어 있다. 비액도 있을 터인데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

 

희양산(998m)의 주봉으로 바위산이 훤칠해 보인다.​

​ 봉암사삼층석탑은 보물169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는 6.3m로 창건 당시의 탑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 탑의 완전체인 석가탑을 모본으로 균형 잡힌 모습이 상쾌감을 준다.

 

​탑은 절의 중심으로 대웅전이나 대웅보전 앞에 위치하는데 뒤에 보이는 법당은 금색전으로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금색전 자리에 예전에는 중심 법당인 대웅전이나 대웅보전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뒤 희양산 암봉과 같이 잡아 보았다.

 

​ 지대석과 기단부의 모습으로 기단은 1층 기단이다. 앞에 배례석이 보인다. 봄 꽃들의 꽃 공양이 한창이다.

 

​拜禮石이다. 다른 곳의 배례석에 비해 작고 단순하다.

 

기단부는 2개의 우주(모서리기둥)과 하나의 탱주(사이기둥)로 구성되어 있다. 석가탑은 탱주가 두 개다.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고, 층급 받침은 다섯 개로 통일신라시대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탑신과 상륜부로 귀하게도 상륜부의 모습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남원 실상사 양탑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불국사 석가탑도 그것을 보고 복원하였다.

 

​상륜부는 찰주(기둥)에 아래서부터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의 순서로 정연한 모습이다.

 

​대웅보전 마당에 있는 노주석으로 한밤중 행사 때 관솔불을 피워 올려놓던 석물이다.

 

​ ​노주석은 2기가 있다.

 

​ 봉암사 중창주인 정진대사탑비, 정진대사 긍양(878~956)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애왕부터 고려 광종대까지 다섯 왕의 자문을 하였다고 한다.

 

​귀부, 정진대사승탑은 찾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내려와야 만 했다. 대신 조선시대 함허, 환적 스님 승탑과 석종형 부도를 만날 수 있었다.

 

​이수

 

​이수의 옆모습

 

​이수의 뒤 모습

 

​함허선사(1376~1430) 승탑인 함허당득통지탑으로 팔각원당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함허선사의 승탑과 조선시대의 주종을 이루는 석종형부도

 

​환적선사(1603~1690)는 임란으로 불탄 봉암사가 자리를 잡은 후 주석한다. 탑명은 환적당 지경지탑이다.

​ ​석종형부도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있다. 원형의 승탑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깨달음은 방석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 봉암사를 벗어나 위로 6~7백 미터 계곡을 낀 산길을 걸어가면 나타나는 백운대 마애보살좌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높이는 4.5m다.

 

도심의 사찰이 아닌 산중 사찰은 대체적으로 계곡을 끼고 올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길을 따라 오르고 내리는 절은 그대로 행복한 명상 길이 되는 것이다.

 

​ 백운대는 아주 넓은 너럭바위로 3~4백 명이 충분히 않아서 쉴 수 있는 곳이다. 아마 이곳도 출입이 통제되는 구역일 것이다. 그러니 오염원이 없는 계곡은 그대로 청정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이다.

 

​처음엔 性穴 성혈인 줄 알았는데 이 암반을 두르리면 목탁소리가 난다고 한다. 이것은 돌로 두드려 나타난 것이다. 성혈은 청동기시대 고인돌에도 나타나는 오래된 민속신앙으로 돌로 홈을 파면서 소원을 빌었던 흔적이다.

​ ​백운대 너럭바위를 타고 내리는 물줄기는 모든 사람들의 엉킨 마음을 풀어줄 듯 시원스럽다.

 

 

 

​문경 봉암사를 시절 인연으로 이렇게 돌아보게 되었다. 책을 통해서 보고 상상으로 생각했던 고색창연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청정수행도량으로 수행 정진하는 그분들이 계시는 한 봉암사는 처음 문을 열었을 때의 그 봉암사일 것이다.

 

 

희양산문은 구산선문 중 도당 유학을 하지 않은 스님이 산물을 열고 육조 혜능의 남종선이 아닌 신수의 북종선을 받아들인 곳이다.

 

 

《 이지누의 책 》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단속사 터 편에 "신행이 펼치던 북종선은 아직 활짝 핀 선은 아니었으되 화엄의 풀밭에 뿌리 뽑히지 않을 견고한 나무 한 그루를 심은 것이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법인 덩치 큰 꽃을 피우지 못했으면 또 어떠라. 겨우내 찬바람을 견디며 이윽고 꽃망울을 맺는 매화의 아름다움처럼 신행의 선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신행 선사가 단속사에서 선법을 전할 때는 아직 추운 겨울이었으리라. 그는 겨우 봄이 머물 자리를 마련해 놓았을 뿐 779년 10월 21일 입적하고 말았다. 그 후에 준범 혜은이 빈자리를 지켰으며 비로소 아름답게 피어난 꽃이 지증선사 도헌이다. 그는 구산선문 중 희양산문을 열었으니 그곳은 문경 봉암사이다. 그러니 어찌 빛나는 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그 禪花가 피는 계절이 지금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뿌려진 씨앗은 언젠가 때를 만나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리라. 연꽃의 씨앗인 연자는 1~2천 년이 지나도 싹을 틔울 수 있는 조건이 되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