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 靜 ...우두커니, 멀거니/낯설게 하기

미루님의_화가 장욱진_페북에서 모셔옴

레이지 데이지 2020. 8. 26. 09:20
얼마 전에 페친 김연의님과 양주에서 하루 휴가를 즐겼다. 장욱진 미술관도 다녀왔다. 오늘 페북에서 불러온 과거의 일 중에 장욱진 관련 글이 있어 다시 읽어 본다.

주말에 장욱진미술관에 다녀왔다. 우리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아픈 몸 살살 달래가며 다녀오기에 좋았다. 2004년 11월에 이 화가에 대하여 써놓은 글을 다시 꺼내서 읽어본다. 참 길다. 1,2로 나눠서 올린다.

(화가 장욱진-1)
우리 학교 게시판에 11월의 문화인물 포스터가 나붙었는데 얼핏 보니 화가 장욱진이었다. 집에 와서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빼 들었다. '그 사람 장욱진'이다. '한 사회과학도가 회상하는 화가 장욱진'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한 사회과학도란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였던 '김형국'이다. 책 표지는 손때가 묻어서 좀 꼬질한 흰색이다. 앞장은 먹그림으로 그린 화가의 초상화고 뒷장은 저자와 화가가 신갈 한옥 화실 툇마루에서 찍은 흑백 사진 아래 저자의 말이 얌전하게 놓여 있다.
* 조그맣고 단순한 것을 사랑한, 큰 화가 장욱진. / 몸과 마음 모든 것을 그림을 위해 다 써버리고 / 남은 시간은 술로 휴식하던 치열한 도인. / 그의 그림 속에선 해와 달, 까치와 호랑이도 신건이 되었다. / "나이는 먹는 게 아니라 뱉는 것이지." / 칠십 평생 어린 아이 같은 웃음과 천진한 마음만 기억 속에 남기고 / 새처럼 떠나간 사람, 여기 그 삶의 투명한 흔적을 글로 남긴다.
--책장을 넘기니 메모 한 줄도 없이 달랑 구입 날짜만 써 있다. 1993년 5월 5일. 난 이 책을 어느 서점에서 샀을까? 더구나 그 날은 어린이날 휴일인데 또 뭘 했을까? 잠시 11년 전의 어느 봄날을 더듬었다. 생각난다. 그 날 나는 용문사에 갔었다. 새로 산 주황색 등산사파리와 노란색 바탕에 초록색 꽃무늬가 있는 코듀로이 반바지를 입고 역시 새로 장만한 초록색 스웨이드 등산화를 신었다. 온통 새 것에 신록의 오월이었으니 기분 또한 산뜻했을 것이다. 새벽에 집을 나서 청량리에서 양평까지 기차를 타고 양평서 다시 버스를 타고 용문사에 갔었다. 내친 김에 상원사까지 등산을 하고 저녁 기차로 돌아와서 숭문당에 들렀다. 그 당시엔 외출을 해서 돈을 좀 많이 쓴 날은 서점에 들러서 책을 사곤 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변명거리를 주었다. "오늘은 책 사느라고 돈 쓴 거야."
왜 이 책일까? 장욱진 화가의 그림을 좋아한 이유도 있었지만, 어쩌면 화가와 저자의 만남에 대한 호기심과 부러움이 더 크게 작용한 탓이리라. 김형국은 이렇게 말한다. "그를 만나 행복했다. 이 글은 그 행복에 대한 기록이다." 이 책은 화가가 덕소 화실에서 생활하던 때인 1973년에 처음 만나 1990년 12월 화가가 타계하기까지 이어져 온 만남에 대한 개인적 기록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장욱진 화가에 대한 일종의 평전이다. 훗날 화가는 저자를 우리 식구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곤 하였다.
첫 장 '열여덟 해 동안의 만남'에서 저자는 임어당의 말을 인용했다.
* "사람이 한 사람의 작가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바로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저자는 영혼으로 화가를 만났던 것 같다. 저자처럼 나도 만나보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가? 1993년 그 시점에서 영혼으로 경도되어 있던 예술가가 누구였을까? 한번쯤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화가 천경자와 소설가 이청준이었다. 천경자는 1995년 화가의 고희 회고전에서 악수도 나누고 도록에 사인도 받았지만, 이청준은 이제 별로 좋아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결국 영혼으로 경도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평소에도 그림 보기를 즐기던 저자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만 안 된 어느 날,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화가의 그림 '까치'를 보고 큰 감명을 받는다. 미국 유학 시에 이미 내노라하는 세계적인 화가의 그림을 두루 보면서 미술에 대한 안목을 갖추었던 저자는 장 화가의 그림이 자신이 보았던 유명한 서양 화가의 그림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 화가 앞으로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200자 원고지 8장으로 쓰여진 편지는 겸손하면서도 참 유려한 문체다. 이 편지를 본 이는 화가의 부인이었고 부인이 화가를 만날 수 있는 전시회를 안내해 주었다. 훗날 부인 말에 의하면 저자가 총각인 줄 알고 딸 많은 집에서 사윗감으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유복한 가정에 멋쟁이 아버지를 둔 장욱진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훗날 고모에게 이 사실이 발각되어 매도 맞았다고 한다. 고모는 때리면서 "세상에서 첫째 둘째 가는 화가라면 모를까"하였는데 장욱진은 1937년 '전조선학생 미술 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이런 외부적 조건이 화가의 내면적 열망을 펼치는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되었다.
40쪽에는 파란 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은 부분도 있다.
* "장욱진은 어린 시절에만 상이 의미 있는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라 했다. ~~~~ 철저히 자신의 내재율에 의미를 두는 방식이 바로 장욱진의 경우였으니, 그의 그림 입문은 바로 외부에서 받은 인정을 자신의 내면적 필연으로 승화시키고 그리하여 그걸 확신하는 과정이었다."
--아마 그 당시에 나는 '자신의 내재율'이란 단어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삼십 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나의 내재율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에 대한 반성이었을까? 아마도 모르긴 해도 나는 그 부분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책장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 57쪽, "그러나 지원과 격려는 어디까지나 외부적 여건이다. 때문에 화가로서 홀로 서는 과제는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는 자의식을 한결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의식이란 결국 아무도 자신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상황의 인식이겠는데, 이 인식이 깊어질수록 화가의 고독은 바로 그의 생활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활이 결국 그의 한평생을 꿰뚫은 인격이 되고 말았다."
* "156쪽, 바꾸어 생각해 보면 집안과 세상의 후원이 있고 없건 간에 그림 같은 예술 작업은 본질적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어야 성립할 수 있는 존재양식이다. 결국 예술가가 믿을 곳은 바로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화가의 자기애적 성향은 필연으로 보아진다."
--예술가란 모두 고독한 존재다. 누구도 들여놓을 수 없는 자기만의 방에서 자의식이 터질 듯 팽창했을 때 분출되는 영혼의 표현이 바로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란 단순한 감상과 정서의 문제가 아니라 강한 정신력의 산물이다.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들끓는 내면의 에너지가 있기에 예술가들은 때로 기인처럼 살 수밖에 없다. 괴팍하다고 손가락질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의도한 치기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무위의 결과다.
(화가 장욱진—2)
화가 장욱진은 특히 술을 사랑했다. 저자는 이것을 "술독 50년"에서 다루고 있다.
* "105쪽, 그림을 그리다가 붓대를 놓으면 좀 허했다. 그래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아야 했다."
--명정(酩酊)이란 단어 옆엔 파란색으로 '술에 몹시 취함'이라고 낱말 뜻을 메모해 놓았다. 아마 그때 처음 접한 단어인 것 같다. 저자는, 화가가 술에 대하여 경건한 신심을 갖고 있는 듯했다고 회상한다. 화가는 안주나 밥을 곁들여 술을 마시는 법이 없었고, 한번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취할 때까지 마시고 몇 날 며칠을 마신 적도 있었다니 지독한 애주가임에는 분명하다.
* "109쪽, 또 하나는 세속의 가치와 체면을 잊기 위한 자기 정화적 효능이다. 화가의 술은 흥을 돋우는 술이 아니다.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심으로써 온 세상에 오로지 혼자라는, 아니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순간을 체험한다. 그런 순간이야말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상태를 예비한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나는 짐작해 본다. 동시에 그림에 대한 한평생의 죄의식을 극복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화가가 그림을 시작했을 때는 세상이 그림을 천형으로 알았고, 그래서 집안 어른들이 극구 만류했다."
* "110쪽, 화가는 불쑥, 나는 평생에 그림을 그린 죄밖에 없다고 자주 말했다. 그림 그리기가 일상 생활과 모순된다고도 했다. 그림은 생활을 꾸려 가야 하는 일의 소득성과는 인연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처럼 벌이와 무관한 그림을 한평생 숙명처럼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 죄의식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죄의식을 잊는 손쉬운 방법은 술에 탐닉하는 것이다."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는 일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하고, 수안보 화실 시절에 자주 이용했다는 택시 기사도 화가가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시간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고 하는 것을 보면 술에 대한 화가의 탐닉을 단순히 알콜중독으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술에 취해서만 살 수 있는 사람, 술이 주는 자유로움으로 한없이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사람, 명정, 그런 사람 곁에 있는 가족의 고통은 의외로 컸을 텐데도 화가의 아내는 내조를 잘 한 것 같다. 아마도 화가를 아이처럼 어루만지며 보듬었을 것이다. 술 마시는 아버지를 둔 아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들의 회상을 보자. 이 아들은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다.
* "210쪽, 화가가 타계한 뒤 그 아들은 울먹이며 나에게 숨겨두었던 일화 하나를 들려 주었다. --아버지가 대취하면 집에 들어왔다가도 이불을 싸들고 현관 앞 땅바닥에서 잠들려고 했다. 그래서 가까스로 끌다시피 집안에 모셔다 놓으면 다시 나가시곤 했다. 그게 여간 힘들지 않았다. 술을 먹은 아버지는 왜 그렇게 기운이 센지, 하도 그렇게 소동을 피길래 어린 마음에 이불을 뒤집어씌우고 가슴팍에다 주먹질을 했다."
~~~~~ 화가의 에세이집 제목은 '강가의 아틀리에'이다. 화가는 유난히 집에 집착했다. 화가의 그림 속에는 자주 집이 등장한다. 화가는 직접 설계하여 집을 짓기도 하였다. 집을 지을 때는 그림조차도 그리지 않고 술도 안 마셨다고 하니 화가는 집 짓는 일을 진정으로 즐겼던 것 같다. 집이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가족의 보금자리다. 화가는 집을 통해 따스한 가족의 정을 그렸던 것이다. 화가는 명륜동 집을 두고 당시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덕소에 화실을 꾸몄고, 덕소에 공장이 들어서자 수안보에 한옥을 구입하여 화실 겸 살람집으로 개조하여 살았다. 훗날 그 곳도 처분하고 화가는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에 화실을 마련하였다.
화가는 스스로 '먹그림'이라고 부른 그림을 자주 그렸다. 이 작업을 화가는 스스로 '붓장난'이라고 이름했는데 신명에 의해 그리는 유희적 성격이 짙은 그림이었단다. 화가는 이 먹그림을 반드시 새벽녘에만 그릴 수 있다고 했다.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집중해서 그렸다는 뜻이리라. 이 때 그림은 화가의 그림이 아니라 수행가의 명상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화가의 그림에 매료되어 직접 화가와 만나기를 희망하였고 결국 두 사람은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다. 저자는 화가의 그림 어떤 점에 매료되었던 것일까? 매료된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나는 그냥 좋아할 뿐이다. 화가의 천진난만한 동화 같은 단순함을 좋아한다. 과감한 생략과 절제 속에서 빛나는 순진무구한 선과 면을 좋아한다. 유화기법을 이용하는 서양화이면서도 동양적 무위의 사색이 느껴져서 좋아한다.
화가는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손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고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그는 논리적 이성보다 직관을 믿었으며 누군가가 자신의 어눌한 말을 이해하면 이렇게 응수하곤 했다.
* "161쪽, 젊어서는 센스가 있어야 하고, 나이 들어서는 위트가 있어야 한다." 화가가 신체에 대해 전매특허처럼 한 말이 있다. 몸뚱아리는 쓰기 위해서 잠시 빌리고 있을 뿐이다.라고.
--화가는 틀니를 하고 백내장 수술을 하였다. 눈이 안 보이니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되더라고 말했던 화가와 이를 존경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저자, 참으로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한 모습이다.
화가 장욱진은 작은 그림을 많이 그렸다. 2호에서 4호 정도 크기가 대부분이었는데 화가의 말을 들어보자
* "197쪽, 그림의 크기가 도대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형성의 구사는 작은 사이즈도 충분히 크다." 이런 말도 덧붙인다. "작은 그림은 고집이 아니다. 자연히 그렇게 됐다. 작은 그림은 친절하고 치밀하다."
--거대한 물량주의로 눈이 뒤집힌 70년대 이후 한국 산업화 과정에서 화가의 생각은 철학적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작아서 더 큰 것이 우리 곁에 얼마나 많은가. 나도 화가의 작은 그림 한 점 내 집 벽에 걸어두고 싶다.


...나도 이렇게 세세하고 꼼꼼하고 차분하게 기록하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