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문화지평_입동날...답사

레이지 데이지 2021. 11. 10. 23:10

#가을만끽끝장답사

《가을이 고즈넉 무르익어 가는 11월 7일은 절기 상 입동이기도 합니다. 가을빛이 좋은 성북 일대와 성균관을 거쳐 단풍이 예쁜 창경궁까지 '가을만끽 끝장답사'를 할까 합니다.

집합은 길상사에서 9시30분. 배건욱 역사문화 해설사님이 동행합니다. 창경궁에서는 김태휘 역사문화 해설사님이 해설을 이어갑니다.

문화지평이 아닌 개인 계정 친구들을 초대합니다. 친구 중에 문화지평 회원이 아닌 분이 더 많거든요.  이 가을을 친구분들과 만끽하고 싶습니다. 밥값 넉넉하게 들고 오세요. 딱 열분만 모시고 마감합니다. 

- 11. 7(일) 09:30
- 길상사 관세음보살상 앞

<답사코스>
길상사-선잠단지-최순우옛집-간송미술관-이종석별장-이태준가옥-심우장-북정마을-<<점심>>-송시열 집터-성균관-

<<1차 자유롭게 해산>>-창경궁(사진) 이동

WITH  김태휘 배건욱 NiCo Kwon》


길상사

 

선잠단지...궁궐여인들의 유일한 행사.

 

최순우옛집_간송 미술관

공사중이어서 출입금지이었다. 개들이 짖는 소리만 울렸다.

근데 지키미 개들은 꼬리를 흔들며 짖는것은 아마도 반갑다는 것이겠지.



이종석별장...경강상인으로 새우젖 장사로 큰돈을 벌었다. 지금은 덕수교회소유로 교인 연수나 수양회 장소로 쓴다.

문이 잠겨있어서 담벼락 구멍에서 몰래 엿보다.

 

누마루가 있나없나로 집의 격을 가름 했다는데  누마루는 다락처럼 한 층 높게 만든 마루. 건물 바닥을 지면으로부터 높이 띄워 지면의 습기를 피하고 통풍이 잘 되도록 한 누각 형식의 마루를 말한다.  이 공간은 집주인이 글을 읽거나, 손님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장소이다.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내기 위해 이곳을 찾으며, 마름은 소작인들에게서 받은 소작료를 계산하거나 문서를 작성한다. 그래서 사랑채와 연이어서 짓는 경우가 있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많은 유학자들이 경치 좋은 곳에 원두막처럼 누각이나 정자를 지어 놓고 시서화를 즐기거나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누각이 사랑채에 붙기 시작했다. 그래서 양반가에서는 보통 사랑채 전면 한 칸을 튀어나오게 하여 누마루를 깔아 그 역할을 하도록 했다.

창덕궁 낙선재의 누마루는 비교적 높게 설치된 것으로 머름하방 밑에는 구름조각이 된 낙양을 설치하여 신선들이 산다는 운상각(雲上閣)임을 상징화하고 있다. 누마루는 습기를 차단하고 통풍과 환기가 원활해 여름에 유용한 공간이다.


상허 이태준

지금은 찻집인지 료리집인지 상업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침 식전도 아닌 11시인데 영업 준비중이라고 주인은 아니 종업원 대장같은 여인이 쇳소리를 내며 지청구를 준다.

하긴 콜로나시절이고....서로 재수없는 순간이었다.


심우장_만해 한용운.

조금 지친듯 하고 흥이 사라졌다. 북정마을 골목을 올라오다 보니 언덕에서 지친듯 하다.

 

북정마을...성북동에 위치한 마을로서 오래된 골목길의 정취를 즐길 수 있을뿐만 아니라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한양도성 백악구간 코스에 포함되어 만해 한용운의 유택인 심우장과 연계하여 관광을 할 수 있다.

 

-<<점심>>-마준터

점심특선 만원으로 꽃게무침+순두부  먹었다.

 

송시열 집터...송시열 사단 준 피폐된 유학을 느껴본다. 고집스런 늘근이와 그의 추종자들. 중종 송시열이후 불교탄압이 극심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중종의 계비가 중보우와 수렴청정을 자행했기때문 아닐까 싶다. 승려 보우를 등용해 봉은사의 주지로 임명하고 적극적으로 불교를 키웠습니다. 이것은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많은 유학자들의 반발을 샀지요.

 

연산군의 폭정으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발생한 이후 성종의 적자 차남 즉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성종의 3계비인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중심으로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나 중종이 등극하게 됩니다.  중종의 초기에는 조광조를 기용하여 개혁을 시도하지만 기묘사화를 통해 중종 스스로 포기를 하게 된다.

이러한 중종이 죽고 중종의 적자 장남인 인종으로 이어지지만 8개월만에 요절하여 중종의 적자 차남이며 인종의 이복동생으로 문정왕후의 아들이 명종으로 등극하게 되는데, 인종의 세력인 대윤파와 문정왕후 세력인 소윤파가 극렬하게 대립을 하여 대윤파가 사라지는 것이 을사사화로 명종이 등극하자말자 일어난 것입니다. 이후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을 무시하면서 외척정치를 자행하는 것이고 윤원형,정난정과 승려 보우가 힘을 더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선왕조에서 최초로 자행된 외척정치입니다


성균관윗동네...공자神으로 신성시한 처사로 자신도 같은 반열이라고 생각한듯 하다.

 

성균관의 뒷편에서 유학자들이 宋洞이라고 골짜기를 점유했던거다.

 

 

-성균관-

성균관은 대체로 인재양성의 기능과 함께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에 대한 봉사(奉祀)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 있어서는 성균관이 주자학을 연구, 보급하는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기능과 주자학 이념에 입각하여 관리를 양성하는 관리양성소로서의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지배사상과 관료체제를 재편성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성균관(成均館))]

 

<<1차 자유롭게 해산>>-창경궁(사진) 이동



산사나무의 열매를 씹으며 하루를 마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