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불국사

레이지 데이지 2010. 12. 30. 11:16

토함산의 불교유적(1) : 불국사에 대하여 불국사에 대하여

1. 개관 불국사는 한국 불교사원을 대표하는 사찰이며, 최근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토함산 석굴암과 더불어 신라불교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절이자, 사천왕사(경주시 남산 소재), 감은사(경주시 감포 바닷가 소재)와 더불어 통일신라시대의 쌍탑 가람을 대표하는 절로 주목받아 왔다. 특히 경내의 다보탑, 석가탑 및 장대한 돌축대는 석조건축사의 기준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불국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부단한 복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인 신라 경덕왕 때의 옛 모습대로 복구되지는 못하였다. 17-18세기 200여 년에 걸친 재건 노력으로 대웅전과 극락전 일곽은 복원되었으나(대 웅전은 1765년, 극락전은 1800년, 자하문은 1781년작, 그외 현존 목조건물은 모두 1970년대에 복원된 새 건물임), 조선말기에 들어와 정부에서 요구하는 강제 잡역에 의하여 침체되었고, 일제 침략기 이후에는 사세가 극히 약화되어 심하게 퇴락되었다. 1914년에 촬영한 흑백 사진에는 퇴락한 불국사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24-5년에 걸친 일제의 수리공사는 원형 복원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며, 일본의 식민통치를 드러내기 위한 전시 관광행정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걸쳐 우리 정부가 시행한 발굴조사와 복원공사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다. 1966년에는 석가탑의 도굴미수 사건이 일어나 석가탑을 해체 복원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3년 뒤에는 짧은 기간의 발굴을 거쳐 1970년대 초에 유례없는 복원공사를 시도하였다. 오늘날 발굴상의 문제점과 복원상의 개선책이 논의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발굴이나 복원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은 정부에서도 사찰 측에서도 아직 준비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2. 일제침략기의 중요 조사 : 후지시마({조선건축사론}, 161-190쪽) 후지시마는 문헌조사를 토대로 불국사의 연혁을 정리하는 한편, {佛國寺古今創記}를 자료로 하여 건물의 명칭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여,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사역 전체가 파괴되었던 사실을 적시하였다. 이는 關野 貞이 {한국건축조사보고}(1904년)에서 제멋대로 조선왕조의 排佛정책을 불국사 퇴락의 원인으로 꼽았던 태도에서 한걸음 전진한 것이다. 그는 조선총독부에서 실측한 도면과 자신의 실측 자료를 토대로 전체적인 배치현황을 원래의 모습에 비추어 설명하는 한편 당간지주·청운교와 백운교·자하문·범영루·회랑터·다보탑과 석가탑·석등과 배례석·무설전터·나한 전터(원래의 비로전터)·칠성각터(원래의 관음전터)·극락전 일곽의 연화교와 칠보교·안양문과 남회랑터·좌우 경루·범종각·비로전·관음전·만월당·문수전·향로전·시왕전· 백양전·동별실·조사전 등을 유적과 문헌을 대비해가면서 설명하였다. 한편 총독부가 실측한 도면에는 다보탑의 평면도·입면도·단면도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일제가 1925년에 다보탑을 해체하면서 그린 도면일 것으로 보인다.

3.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발굴조사와 중건({佛國寺復元工事報告書}, 1976) 당시 집권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에 의하여 2개월 동안 추진된 지나치게 서두른 단기간(1969. 8. 29 - 10. 31)의 발굴조사 내용을 토대로, 1970년 초부터 1973년 6월까지 한 3년 동안에 걸쳐 성급하게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때의 발굴조사와 복원공사의 전 과정은 1976년에 간행된 보고서(불국사복원공사보고서)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이 보고서에는 그밖에도 불국사 관련 문헌기록([新羅東國吐含山華嚴宗佛國寺事蹟], [佛國寺古今創記])과 현판기([大雄殿重創丹?記], [紫霞門重創記]) 등까지 수록하고 있어서 이후 불국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불국사가 그나마 조선말기까지 寺勢를 유지한 것은 17-18세기 200여 년 동안 줄기차게 지속된 寺衆의 노력에 의한 것임은 순전히 위 기록들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중요한 사실이다.(이강근, [불국사의 불전과 18세기 후반의 재건역]{불국사의 종합적 고찰}, 경주시·동국대, 1997, 77-114쪽) 발굴조사가 진행된 시기나 기간으로 보아 미진함 점이 비교적 많았으리라고 짐작되지만 이후 보완적인 발굴조사는 1983년에 극락전 서북부의 지하 유구를 조사한 것(김동현, [경주 불국사 극락전 서북부 지하 유구 발굴조사]{문화재} 16호, 1983. 12) 외에는 시행되지 않았으며, 현재 大石壇 아래쪽의 極樂九品蓮池에 대한 발굴조사가 속개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학계의 아쉬움이 고조되어 있다.

4. 석가탑 해체수리·복원({불국사 석가탑내 발견 유물 조사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66) 한편 도굴범의 도굴 미수 사건을 계기로 문화재관리국에 의하여 시행된 1966년의 석가탑 해체수리와 복원 공사도 석탑건축의 연구사, 그리고 사리장엄의 연구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석가탑 사리구멍 안에서 사리장엄구(금동 외함, 은제 사리합)가 발견되었는 바, 동경, 옥류, 작은 목탑, 비취 곡옥, 구슬 등과 함께 저 유명한 {무구정광대다라 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세계 최고의 목판본)이 함께 출토되었다.

5. 불국사 감상의 키포인트 세간에서는 1970년대 초에 시행된 복원공사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이 많다. 행각(혹은 회랑)의 지붕을 높게 만든 나머지 자하문 처마 밑을 손상시켰고 나아가서 종각을 헐고 다시 지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지적, 행각에 외벽을 둘러 중정을 오픈 하지 않고 폐쇄한 것도 문제라는 지적, 극락전 앞 축대의 맨 왼쪽에 있었던 경루(經樓)를 복원하지 않은 것은 큰 실수라는 지적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비판적으로만 보는 반면에 옛 건물을 복원하는 시도 자체가 획기적 실험이었다는 점을 이해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며, 애써 불국사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것도 여행이 주는 즐거움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려는 사람들에게, 더구나 외국인에게 복원공사의 잘못을 애써 지적해 전달할 안내자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긍정적 감상의 포인트는 무엇일까? 불전(佛殿) 앞마당에 나란히 놓인 두 탑에 대해서 그 예술사적 의의, 사상적 의미 등을 멋지게 해석한다면 그리하여 여행자 아니 감상자들로 하여금 뷰티풀을 연발하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지 않을까. 이탑 혹은 쌍탑을 불전 앞에 배치한 것은 경주 사천왕사(679년 건립)에서 처음 일어난 사건으로 사원 디자인의 역사에 새로운 변화를 예고한 것이었다. 사천왕사를 뒤이어 세워진 망덕사, 감은사(681년 건립) 등을 비롯하여 지금은 그 이름을 잃어버린 많은 절터에도 두 탑이 세워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 탑에는 서로를 구별짓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오로지 불국사의 경우에만 '석가'와 '다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석가탑에는 당연히 석가모니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다보탑에는 다보불의 사리가 모셔져 있는 걸까? 역사상 실존한 적이 없는 다보여래의 사리가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다보여래는 누구인가? 다보와 석가의 관계는 또 무엇인가? {법화경} [보탑품]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내친 김에 법화경을 줄줄이 읽어 보는게 어떨지. 신라불교사에서 법화경의 사상사적 의의는 또 어떤지? 이런 의문은 전문 학자나 품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좋은 질문 속에 이미 답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이번에는 의미보다는 형태에 주목하자. 다보탑은 복잡화려하고, 석가탑은 단순질박하다. 석가탑 주위 땅바닥에는 사각형 틀 안에 8송이의 연꽃이 배치되어 있고, 그 안쪽에 다시 삐죽삐죽 솟아나온 바위들이 탑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바위산 위에 솟은 탑 전체를 8송이의 연꽃이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반면에 다보탑은 사방 출입구마다 계단을 설치하고 멋진 돌기둥을 세워 당당한 오름 시설을 마련하고 있다. 1층에는 사자 4마리가 특이한 모양의 돌기둥 5개 밖에서 포효하고 있다. 그 위에 1층 지붕이 얹혀져 있는데, 지붕 위로는 8각형을 기본 도형으로 제작된 복잡다기한 물상이 마치 나무를 깎아 만든 것처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건축물인지 공예품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 복잡함은 그러나 꽃을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사자가 지키고 있는 부처의 집 지붕 위로 꽃비가 내려와 앉은 형상으로 보인다. 한 마당에 있는 두 탑은 불국사를 창건할 때 아사달(백제인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백제의 옛 영토였던 곳 출신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겠다.)이 모두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이질적인 두 형상을 훌륭하게 조화시킨 이 건축가의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 듯, 우리 건축사에서 이런 걸작은 다시 만들어지지 못하였다. 다만 석가탑을 모방한 탑은 이후 석탑의 역사에서 주류가 되었지만, 다보탑은 예술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왜 그랬을까? 나름대로 해석해 보자.

6. 노파심에서 한마디 경주는 신라 왕국이 천 년 이상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래서 가장 최근에 왕궁 주변의 도심부 유적지 전체(지정명 : [경주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경주를 찾는 이들에게 신라의 역사를 잘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중국의 {삼국지}를 열 번은 읽어야 교양인이라고 하시는 어른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신라의 역사책인 {삼국유사}를 열 번 읽는다면 교양인을 넘어 전문가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경주에 도착하기 전에 오는 차(관광버스라면 제격이다) 안에서 이런저런 신라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불국사나 석굴암을 이해할 마음의 준비를 마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이강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