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20100109}감은사址

레이지 데이지 2010. 1. 10. 16:24

감은사지 

 

김석환이 엄청나게 좋아하는 3층석탑.

 

 

 

 

 

 

 

 

 

 

 

 

 

■울주군의 참신한 발상  

 2011년 03월 08일 (화) 21:45:10 울산제일일보 ujeil@ujeil.com   

울주군이 두동면 봉계리 불고기 특구단지 일원에 ‘봉계 경관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2억3천500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주변 농지에다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뿐 만 아니라 계절에 어울리는 나무와 꽃을 심는다고 한다.

먹거리 특구에 그치지 않고 지역과 어울리는 경관을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도 제공하기 위해서다.

 

울주군이 봉계불고기특구 주변에 새로운 경관지역을 만들기로 한 것은 아주 잘 한 일이다.

작금의 불고기특구는 이름만 특구일 뿐 관광객들이 ‘특별한 곳’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시골 농지 한 구석에 올망졸망 붙어있는 소고기 불고기식당 집합군(群)정도로 생각한다.

외지인들이 경주에서 울산으로 오다가 아니면 언양에서 경주, 대구로 빠져 나가다 잠시 식사하고 떠나는 곳이 돼 버린 것도

그래서다. 봉계 불고기특구에는 현재 영업 중인 불고기식당 몇 군데와 최근에 들어선 노래방을 제외하면 잠시 앉아 쉴 곳이 없다. 어느 음식점이든 들어가지 않으면 화장실 사용조차 불가능한 상태다. 이런 지역에 관광객이 몰려와서 몇 시간 씩 머물기를 기대했다면 생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반월성 지역에 유채단지가 조성돼 있는 경주를 예로 들어보자. 봄철에 이곳은 유채꽃을 찾아온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가까이에 있는 첨성대나 안압지, 반월성보다 이 유채 밭이 더 많은 인기를 누린다. 유채 밭 곳곳에 설치된 조명덕택에 밤늦은 시간까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여름철에 접어들면 연꽃 못(池)을 찾아온 관광객들 때문에 인근 도로가 마비될 정도다. 이 일대 음식점, 식음료 가게들은 이들 외지인들 때문에 겨울철을 제외하고 항상 호황을 누리고 있다.

 

두동면 봉계 불고기특구에도 이런 경관을 조성하면 특구가 되살아 날 수 있다. 음식점에서 나온 관광객들이 봄에는 유채 밭, 늦여름에서 가을 초입까지는 코스모스, 해바라기 밭을 거닌다고 상상해보라. 그 경관을 찾아드는 외지인들만 가지고도 봉계 불고기특구는 붐을 타기에 충분하다. 다만 한 가지, 지나치게 인위적인 조성사업은 재고하길 바란다. 자연 친화적 조성계획을 세우길 권한다.

 

■감은사지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동해안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 사적 제31호. 〈삼국유사〉에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해 682년(신문왕 2) 완성했으며,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鎭國寺)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 1960년과 1979~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이탑식가람(二塔式伽藍)배치로 남북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며, 양 탑의 중앙부 뒷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금당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금당의 바닥구조가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위에 직사각형의 석재유구(石材遺構)를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모양으로 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롭다. 원래 앞면 8칸, 옆면 4칸이었던 북쪽 강당은 후대에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고쳐 지은 것도 밝혀졌다.

 

▶감은사지동서3층석탑

감은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3층석탑 2기. 국보 제112호. 높이 13.4m. 동서로 건립된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은 동일하며, 현존하는 석탑 중 거탑(巨塔)에 속한다. 기단은 상하 이중으로 되어 있고 지대석·중석·갑석은 12장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층기단에는 3개, 상층기단에는 2개의 탱주(撑柱)를 세웠다.

 

 탑신부의 1층은 우주(隅柱)와 면석(面石)을 다른 돌로, 2층은 각 면을 하나의 돌로, 3층은 전체를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옥개석은 비교적 넓고, 낙수면 부분과 받침부분이 각각 4장의 돌로 되어 있으며, 상륜은 없어졌고 그것을 끼웠던 3.5m의 철간만이 남아 있다. 상하기단과 탑신부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한 것, 낙수면이 경사를 이룬 것 등에서 목조건축양식이 보이며,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에서는 전조탑파양식(塼造塔婆樣式)의 흔적이 보인다. 고선사지3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초기 3층석탑을 대표한다.

▶감은사지서3층석탑 내 발견유물

 

보물 제366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59년 12월 감은사지 서쪽 탑을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의 사리공(舍利孔)에서 발견된 유물로, 청동제 사리기와 사리기를 넣었던 청동제 사리외각함(舍利外角函)을 말한다. 사리기(높이 20cm)는 기단·몸체·보개(寶蓋)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 보개부분은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정사각형의 기단에는 내부에 중대(中臺)를 세우고, 그 바깥 벽에는 1면에 2개씩 안상(眼象)을 투각하고, 그 사이의 공간에 신장상과 공양상을 따로 주조하여 1구씩 교대로 배치했다. 기단 위에는 주위로 난간이 둘러졌으며 가운데에 보탑(寶塔)을 안치하고 네 귀퉁이에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을 각각 배치하였다. 보탑은 좌우에 고리가 달린 복발형(覆鉢形)에 앙화(仰花)를 얹고, 그위에 이중의 연판받침과 불꽃무늬로 장식된 수정제의 둥근 보주가 놓여 있다. 보탑 안에 있는 수정제 사리병(높이 3.8cm)은 밑바닥까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밑에는 수정제의 원반(圓盤)이 받치고 있다.

 

이 사리기를 담았던 사리외각함(높이 31cm)은 상자형으로, 방추형의 뚜껑이 덮여 있고 아랫부분의 일부가 파손되었다. 사리함의 4면에는 사천왕상(높이 21.6cm)을 1구씩 타출(打出)기법으로 조각하여 붙였다. 사천왕의 좌우에는 짐승얼굴을 한 고리가 달려 있고 그 주위에 꽃무늬가 장식된 동판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천왕상 중 2구는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나머지 2구는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아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사천왕상은 간단한 원형의 두광(頭光)에 갑옷을 입었으며 한 손은 허리에 대고 다른 손에는 각기 보주·금강저·창·탑을 들고 있다. 상태가 온전한 두 상은 각각 소와 주유(侏儒:난쟁이)를 밟고 서 있다.

 

 크기가 작은 상이지만 생동감이 넘치는 얼굴표정이나 당당하면서도 균형감있는 체구와 섬세한 갑옷의 장식표현 등은 당대(唐代) 불교조각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시킨 통일신라시대 사천왕상의 초기 조각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부릅뜬 눈과 수염이 달린 얼굴모습은 서역인을 연상시킬 만큼 이국적으로 당시의 국제적인 문화교류를 짐작케 해준다. 감은사의 건립연대를 682년으로 볼 때 현재 알려진 통일신라의 사천왕상으로는 가장 이른 예이며, 사리기 역시 당시 왕실발원의 공예품으로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