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처음 형진이를 만난 날 대화가 이랬지.
"어떤 영화를 보았는데 장님인 남자가 지나가는 객인지... 점쟁이인지... 하는 말을 들었어.
당신는 이 악기 얼후...줄이 두줄뿐인 악기...의 줄이 1000개가 끊어지는 날 눈을 뜰것이오. 단 쉬지않고 연주해야하오."
그래? 난 못 봤는걸...
어디선가 국어학자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 가운데 하나>는 내가 많이 쓰는 표현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운데 하나라는 표현을 많이 썼는데 이제는 그렇게 말 못한다.
<가장>을 붙일 수 있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는데 정말 하나뿐인가 그런 마음이 늘 있었고...
쓰면서도 늘 조마조마했다.
내가 가장 좋하하는 감독이 첸 카이거 맞을까? 첸카이거(중국), 왕가위(홍콩),
...모두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이다. 그 정도로 좋아하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서극도
빼놓지 않고 본다. 이 정도가 되면 중국계 감독들은 이름만 알면 다 좋아하는 것 같아도 싫고 좋고가 분명해서<영웅본색>의 오우삼이나
<연인>의 장예모 같은 감독들은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모 그저 그렇지...
홍콩보다 영화 산업이 앞섰다는우리나라에서는의외로 좋아하는 감독이 없다.
대학시절에는 임권택 감독 좋아했지만지금은 거의 우상화의 수준이라서(영화계 사람들이)질려서 물러났고 이장호, 박철수 잠깐씩 좋아하다 싫어지고 지금은 이명세 감독 한 사람 정도? 그렇다고 이명세 감독이 영화 만들면 달려가서 보는 것도 아야. 아, 서두가 너무 길었다.
첸 카이거 감독 이야기 하자.
첸 카이거 감독 영화는<동사서독><현 위의 인생>과 <패왕별희>.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보여주는 <황토지> 같은 작품들은 볼 기회는 없고 <현 위의 인생>은 인내심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면 못 볼 작품이지.
나는 <현 위의 인생>에서 영화를 본 게 아니라 그의 속을 살짝 들여다 본 기분이었다.
천 개의 현(줄)이 끊어지면그 현(악기) 안에 개안(開眼)할 수 있는 비법이 적혀 있다고 스승은 뻥을 치고 죽었다.... 그래서 장님 악사는 현을 연주하고 또 연주해 드디어 천 개의 이 끊어지고 그는 현을 들고 마을 약방을 찾지만...다들 눈치 채고 있겠지요?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천 개의 현이 끊을 정도의 연마라면 이미 그 자체가 다른 차원의 개안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영화이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아팠다.
저 사람... 하늘처럼 믿었던그 무엇으로부터 버림 받은 상처를 가지고 있구나.
그 상처가 너무 아파서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주제와 무의식적으로 투영되는 작가의 마음이 또 있구나.
첸카이커 같은 대가의 작품을 보고 그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생각했어.
<패왕별희>도 그렇다. 예술이, 혹은 예술가가 정치 현실로부터 혼자 서서 독자적인 세계를 갖는 것이 가능한가? 그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거기서도 나는 똑같은 아픔을 느꼈다.
<동사서독> 역시 시간의 무상속에 얽혀있는 사람들 관계와 사랑으로 인한 상처를 말한다.
이문열 <사람의 아들>이 생각난다. 이제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회개하고 예수에게로 돌아가겠다는 민요섭을 조동팔이 죽이는 이유도 그거잖아.
<나의 모든 정당성의 근거. 당신이 흔들리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첸카이커는 민요섭 같은 양심적인 배신이 아닌, 거의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나중에 ...최근에 알았지만 그는 한때 홍위병이었고 원작자하고의 친분도 그 때 새이루어 졌다고 하는데...어쨌든 그 시절 그의 자아비판 요구가 너무 굴욕적이어서 대상이 되었던 아버지가 자살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후회하지 않으려 했겠지만.... 아버지가 틀렸거나 나약했거나 주자파로부터 혁명을 지키는 과업 앞에서 육친의 정 같은 건 버려도 좋다고 어린나이에 생각했겠지만 그러나 그냥 그 무슨 헤게모니의 싸움에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늘 그 상처가 그를 붙잡고 있엇고
그런 말을 하면 다들<무슨 뜬금 없는 소릴!>하는 반응이었는데 휠씬 나중에 그가 우리나라에 와서 기자 회견하면서 그런 이야기들을 했을 때 뭐랄까... 나처럼 둔한 사람한테 내가 아주 잘 알 수 있는 방법으로 그가 자기의 내면을 나에게만 보여 준 것 같아서...그런 감정을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쁨이라면 기쁨이겠지.
마치 이목일 그림을 보면 나만 그 작품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다는것처럼.
사랑할 때의 기쁨 같은 것.
사랑할 때 그렇잖아. 그냥 스쳐 지나가는 눈빛 만으로도 알 수 있잖아.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혈액형은 B 형일 것 같고 함께 노래에 열광할 수 있을 것 같고<Donde Voy>이란 노래를 좋아할 것 같고 뭐든 이건 그가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이 저절로 알아지고. 그리고 내게 너무 높아만 보이는 그(내 눈에)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나를 좋아하고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그냥 알게 되는 것. 그런 감정, 그런 기쁨을 느꼈어.
다른 감독의 세계라면 보이지 않았을 텐데 그였기에 가능했던 거야.
사랑도 그렇잖아. 내가 대단해서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교통사고처럼 주어지는 것 아닌가.
나는 첸카이거 감독을 좋아해. 아니 그의 작품을 좋아해...
등산을 마치고 술대신 들어간 영화관에서 느낌이 바뀐다는 감동을 받았다고나 할까..멋진 영화였었다.
세계적인 거장 첸 카이거 감독 <현 위의 인생>과 원작소설 사철생 <명약금현(命若琴弦)>
노인: 스승의 유언으로 현을 끊으면 눈을 뜰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생을 연주만 한다. 인간으로서의 욕구를 억누르며 산다. 이러한 삶이 마을의 성자로 살아가도록 도왔고 몸이 쇠하여 죽기 전 현을 끊음과 현 위의 인생을 되돌아 생각해 본다.
현을 가르친 스승: 노인을 제자로 두어 키웠으나 자신이 죽으면서 현을 제자에게 남길 방법으로 1000개의 현을 연주로 끊도록 유언한다.
시두: 노인의 제자로 역시 소경이다. 그 역시 눈을 뜨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은 있으나 성자와는 달리 천 개의 현을 끊음으로써 눈을 뜨고자 하진 않는다. 연주에는 관심이 없고 “파란 바다는 무엇인지”, “허공(空白)은 하얀 것인지” 등의 속세에 관심을 보이며 란수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스승과 란수가 죽고 난 후에 성자의 빈자리를 채우는 제2의 성자가 된다.
란수: 마을에 사는 손씨 우두머리의 딸로서 시두와 사랑에 빠진다. 마을 사람들이 분쟁을 일으켰을 때 성자에게 중재를 부탁하는 역할을 맞기도 하고 성자와 시두에게 위안과 사랑, 심지어는 깨달음을 주는 인물이다.
국수 집 주인: 등장하는 컷의 수는 적으나 “인생은 모두 연극이며 그 연극의 성패(成敗)여부는 연극이 끝난 후에나 알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마을 사람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필부로서 성자가 신이며 성자의 악기 속에 전설의 처방이 들어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한 마을 사람들이 손씨와 이씨로 나뉘어 사소한 일에도 분쟁을 일삼는 속인들이기도 하다. 성자가 진정한 깨달음-인생은 연극이며 자신의 성자로서의 삶 역시 하나의 연극이었음-을 얻고 난 후의 표현처럼 “앞을 볼 수 있으나 보지 못하는 상태” 즉 눈 뜬 소경들이라 할 수 있다.
- ‘현 위의 인생’ -
한 장님인 노인 음악가. 사람들에겐 성인으로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지닌 것은 현 하나와 역시 선천적인 맹인인 그의 어린 제자 시토 뿐이다. 60년전 노인의 사부는 운명하면서 노인의 인생을 결정지운 유언을 남겼다. `천 개의 현을 끊으면, 현 속의 상자가 열리고, 상자가 열리면 너도 눈을 뜨리라.` 그 후, 모든 인간적 욕망과 단절한 채 현만을 전부로 알고 살아온 노인은 60년이 지난 지금 천 개에서 서너 개가 빠지는 숫자를 채울 수 있었다. 노인은 신비한 성자로 사람들에게 추앙 받고, 그의 음악은 싸움을 멈추고 사람들을 화합하게 만드는 성스러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한편 그의 제자 시토는 유일하게 노인의 왜곡된 삶과 고통을 이해하고, 그 비극적 결말을 예감하면서 뒤섞인 애증으로 노인을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