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1번지
1. 합천 황매산 모산재와 영암사 절터
합천 모산재 아래에는 영암사 절터가 있답니다.
이를테면 폐사지(廢寺趾)인 셈인데, 그러나 망한 절터답지 않게 스산하지도 않고
을씨년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그 기상이 참 씩씩하고 아름답습니다.
절터가 씩씩한 까닭 가운데 하나는 남아 있는 물건들이 돌로 만들어졌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돌 축대가 층층이 쌓여 있어 힘이 느껴지는데다 쌍사자 석등이나 삼층석탑, 금당터 축대 연꽃 문양이나 해태 모양들, 탑비 거북들이 살아 있는 듯이 꿈틀거립니다.그러나 무엇보다 더 큰 까닭은 배경을 이루는 모산재 덕분이라 해야 옳겠습니다.
모산재는 영암사 절터를 감싸고 있습니다. 소나무 노각나무 참나무 따위로 푸르거나 울긋불긋하게 우거진 산이 아니라, 깎아지른 바위가 밝은 빛을 뿜으며 줄을 지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비치는 느낌이 환한 것입니다.물론 뜨고 지는 해도 절터를 씩씩하게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절터와 모산재가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어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줄곧 밝은 빛을 받는다는 얘기랍니다.
2. 표정이 재미있는 바위들
모산재 오르는 길목은 영암사 절터 왼쪽 600년 묵은 느티나무가 있는 옆구리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오르면 바위를 타는 산행이 이어집니다.
산행에서 산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서두르지 않을수록 좋습니다. 서두르는 사람에게는 모산재가 자기 아름다운 모습을 쉽게 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오른쪽 왼쪽으로 눈길을 던지면 그만입니다.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즐거운 풍경들이 눈맛을 키웁니다.
맞은편으로 펼쳐지는 시원한 바위 절벽들이 먼저 그러합니다.
모산재 산행을 하기 전이나 하고 나서는 영암사 절터를 꼭 둘러봐야 합니다.
하하.
돌들에 새겨진 갖은 표정들이 사람을 달뜨게 합니다.
쌍사자석등 틈 사이로 바라보는 모산재는 여전히 상큼합니다.
바위 절벽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느낌이 시원합니다.
까닭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 봤으나, 짐작이 잘 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숲이 우거진 가운데 허옇게 여백처럼 공백처럼 드러나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만, 가파른 바위를 디디며 30분쯤 오르면 무지개 터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좀 오래 머물러도 좋습니다. 왜냐고요? 눈에 담을 거리가 많으니까요. 먼저 괴수가 있습니다. 오르면서 치뜨고 보면 잘 모르는데 올라가서 마주 보거나 내려 보면 모습이 뚜렷하게 들어옵니다. 왼발을 옆으로 넓게 벌리고 입을 벌린 형상입니다.다음으로, 오른쪽 바위 가장자리로 나가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보면 코가 긴 돼지 모양을 한 바위가 있습니다. 어째 보면 코가 짧은 코끼리처럼도 보입니다. 물론 이를 알리는 표지판 따위는 없습니다. 돌이 저 생긴 대로 그냥 있는 것이겠지만 색(色)에 홀리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인지라 이렇게 지어(作) 보는 것이리라 싶습니다.여기서부터 맞은편 바위 절벽을 바라보는 시원함이 줄곧 이어진답니다. 바위에는 풀 나무들이 자라지 않습니다. 바위와 바위 틈새에는 풀과 나무들이 자라는데 저기 자리 잡은 것들은 바탕이 척박하기는 하나 상대적으로 경쟁에서는 자유롭습니다. 이 또한 사람의 마음 작용일 뿐일 테지만, 빽빽한 숲에 들어가지 않고 비켜 서 있는 여유 비슷한 느낌이 오기도 헌답니다.
3. 산마루 조금 못 미쳐 내민 물건 하나
다시 20분쯤 오르면, 이번에는 사람이 꾸며놓은 물건이 하나 나타납니다. 좀 짖궂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산꼭대기에 서둘러 올라야 한다는 생각에 잠겨 있으면 보지 못하고 놓치기 십상입니다.
여기서 산마루(767m)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시원스레 사방이 탁 트여 있기는 하지만 별로 산마루답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태 오른 길이 많이 가팔라서 고생스러웠기 때문입니다(시간으로 따지면 1시간도 안 돼 짧기는 하지만).
여기서 올라온 길을 되짚어 돌아갈 수도 있고 아니면 내쳐 발걸음을 내딛어 산을 한 바퀴 둘러도 좋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두 시간이면 충분하답니다. 오면서 바라봤던 맞은편 바위들 가운데에는 '순결 바위'도 있습니다. 가운데가 패여 있는데, 순결하지 않은 사람이 들어가면 바위가 오무라들어 나올 수 없답니다.
도대체 순결 이데올로기의 끈질김이란!
4. 합천 모산재 가는 길
창원이나 마산에서 가자면 남해 고속도로를 타야 합니다. 함안 군북 나들목에서 내려 의령으로 들어간 다음 길 따라 대의 고개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국도 33호선과 마주칩니다. 진주 쪽에서는 도로가 대의고개 도로랑 만나는 여기 대의 나들목까지 곧바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합천 쪽으로 4km정도 가면 삼가면이 나옵니다. 다리를 건너지 말고 왼쪽으로 틀어서 11km 남짓 거리에 가회면 소재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7km 가면 모산재 들머리가 있습니다. 여기 들머리 주차장에는 자동차가 적어도 50대는 들어설 수 있습니다.
절에서 볼 수 있는 석등은 불을 밣혀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으로 주로
절의 전각(금당) 앞에 있습니다.
영암사지 쌍사자석등도 금당으로 추정되는 건물 터 앞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금당과 석등과 석탑이 일직선 상에 놓여지는 1금당 1탑식 배치는 통일신라시대의 쌍탑가람배치의 양식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서 삼국시대에 창건되어 1기의 통일신라시대 탑이 있는 밀양의 표충사처럼 절의 창건시기를 삼국시대로 유추하기도 합니다.
금당과 석탑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그 사이에 석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석등과 석탑의 조형양식 및 각종 조각들의 훌륭한 솜씨를 볼 때 통일신라시대 절로 보는 것이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석등은 불을 밝히기 위한 것이고,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해 주로 사찰의 금당 앞에 있습니다. 석등의 형태는 하대석,중대석(간주석),상대석(앙련),화사석,옥개석으로 구성되며 옥개석 위쪽에 보주를 얹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특히 간주석 대신에 사자를 쌍으로 배치하는 예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석등이 법주사 쌍사자석등이며, 영암사지 석등도 사자 두 마리가 간주석 대신 상대석을 떠 받치고 있습니다.
석등은 맨 아래 팔각의 지대석에 안상(眼象)을 새겼습니다.
안상은 한자를 풀이하면 '코끼리 눈'입니다.
오른쪽 사진을 보면 맨 아래 지대석이 보이는데, 부조 형식으로 새겨진 조각의 바탕이 되는 모양이 있습니다.
이 모양은 코끼리가 큰 귀를 옆으로 펼쳤을 때 가운데 얼굴과 양 귀의 펼쳐진 모습을 형상화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코끼리의 눈만 상상하면 왜 이것을 안상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하기 힘들게 됩니다.
영암사지 금당 기단석에 새겨진 안상....
그럼 왜 코끼리를 형상화한 안상이 절의 각종 건물과 탑과 등에 새겨져 있을까요?
탑은 부처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든 것이기에, 탑은 곧 부처님으로 숭배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고대 인도에서 태어났고, 코끼리를 타고 세상에 출현하심을 알리셨기 때문에 지금도 코끼리를 부처님을 모시는 상징적 동물로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석등을 보면 사방으로 네모난 창이 뚫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화창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이 곳을 통해 불을 밝히는 곳입니다.
저 안에 촛불(초가 들어 오기 전엔 기름으로 불을 밝혔을 것이고) 같은 걸로 불을 밝혔겠죠?
이 화창이 뚫려 있는 것이 사화석입니다. 사화석은 주로 팔각형 또는 사각형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 모양에 따라 화창도 4개 혹은 8개인 것이 있다고 하는데, 영암사지 사화석과 화창은 방형에 4개의 화창이 있습니다.
화창 주위에 있는 작은 구멍은 나무로 틀을 짜고 그 위에 창호지를 발라 끼워 넣었던 흔적이라고 하네요.
화창의 각 면에 확인하기 힘든 부조형식의 조각물이 보이는데, 제 생각엔 사천왕상을 새겨 넣은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월의 흐름속에 닳아 전체 모양을 알 순 없지만, 아래 쪽 쭉 뻗은 다리 처럼 보이는 것이 대지를 굳게 딛고 선 사천왕의 발이 아닐까요?
석등의 상대석을 받치고 서 있는 두 마리 사자의 모습도 무척이나 정겹습니다.
뒷발로 서서 서로 앞 발을 맞대고 서 있는 모습도 꼭 곡예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지만, 사자의 등 뒤에 붙어 있는 꼬리(제가 생각하기에)도 그 정겨움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저 두 마리 사자를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우락부락하고 무섭게 만들었다면, 저 석등이 제 맛을 내지 못했을 겁니다.
영암사지는 옛 절터 입니다.
그 곳에는 절에 가면 볼 수 있는 대웅전도 없고 불상도 없습니다.
절에서 공을 닦는 스님들도 볼 수 없고, 절을 찾는 보살을 비롯하여 관광객도 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그 곳엔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 곳을 지키고 있는 3층석탑과 석등이 있고, 지금은 옛 모습을 희마하게 기억하게 하지만
옛 사람들의 슬기와 뛰어난 솜씨를 볼 수 있는 흔적들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합천 황매산 모산재 자락에 긴 세월의 기억을 간직한 아늑한 절터가 있습니다.
바로 영암사지(靈岩寺址)입니다.
영암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절입니다.
1984년 발굴을 통해 조사해본 결과, 불상을 모셨던 금당과 서금당,회랑터를 비롯한 건물터가 확인되어 꽤 컸던 당시 절의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영암사지에는 현재 보물 제353호로 지정된 '쌍사자석등'과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으로 세워진 삼층석탑(보물 제480호)과 함께, 통도례단과 금당터의 각종 부조들이 통일신라 석조예술의 우수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영암사지에 남아 있는 보물인 삼층석탑과 쌍사자석등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우리들이 답사를 했을 때, 지나치고 보지 못할 수 있는 것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저도 이번까지 총 3번을 영암사지를 찾았지만 (그 중 두 번은 모산재를 오르고 내려와 그냥 스치듯 지나갔지만), 그냥 탑이나 한 번 훑어 봤을 뿐입니다.
이번에 함께 한 선생님이 대 여섯번을 와서 발견한 것을 말씀해 주셨는데,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합천 영암사지에서 자세히 보면 좋은 것 1.
- 사자의 갈기까지 표현한 기술 -
영암사지의 금당터를 보면 당시(통일신라) 건축 예술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선조들의 돌 다루는 솜씨는, 돌을 '밀가루 반죽하듯' 했다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요즘처럼 발달된 기구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야 말로 정과 망치 하나로 이렇듯 아름답고 정교한 예술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고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영암사지 금당터 앞면 양쪽에 사자 한 마리씩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옆면에도 있습니다.
특히 앞면에 조각된 사자는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자의 갈기까지 자세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수호하는 동물인 사자가 부처님 자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을 인사자(인사자)라 하기도 하며, 부처님이 설법하는 모습을 두고 사자후(사자후)라고 하는데, 이런 말은 모두 진리의 상징인 부처님을 백수의 왕인 사자에 비유한 말입니다.
영암사지를 찾을 때 탑 한 번 쳐다보고 지나칠게 아니라, 당시 이 절을 세웠던 석공의 마음을 한 번 헤아려 보는 게 어떨지......
합천 영암사지에서 자세히 보면 좋은 것 2. - 통돌로 만든 계단 -
앞서도 봤듯이 당시 석공의 돌을 다루는 솜씨는 혀를 내두를 만 합니다.
쌍사자 석등을 가기 위해 오르는 계단 또한 눈으로 감상해보면 좋습니다.
계단을 돌을 보통 계단 처럼 쌓아 올린게 아니고, 돌 하나를 통채로 가공하였습니다.
저 계단을 단지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그 정성과 기술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계단에는 맨 위쪽과 중간, 그리고 아래에 구멍이 세 개가 있는데 쓰임새가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양쪽에 다 있는 걸로 봐서 그냥 모양을 내기 위해 뚫은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혹시 깃대를 꼽는 구멍이었는지.... 아니면.....
(제가 설명을 잘 듣지 못했던 것 같은데, 골포와 탁순 회원들의 설명에 의하면 통돌계단 경사가 심해 난간을 설치했던 곳이라 합니다)
완전히 떡 주무르듯 한 석공의 솜씨를 오늘날 되살릴 수 있을지..?
가파른 경사를 오르기 쉽도록 난간을 설치했던 세 개의 구멍...
합천 영암사지에서 자세히 보면 좋은 것 3. - 앗! 이런 곳에 이런 것이...-
영암사지 금당터를 돌아보고 모두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옮기려는데, 같이 간 한 선생님께서 설명을 해주실게 있다고 하십니다.
이 분께서 영암사지를 대 여섯번 오셔서 발견한 게 있다고 하시며 저희들을 그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앗! 이런 곳에 이런 조각이... 눈여겨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저도 방금 전에 그 곳을 지나갔는데, 보지 못했던 것이 있네요.
금당터 뒤쪽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것 같은 부조형태의 조각이 눈에 들어옵니다.세 개의 조각이 있는데, 가운데 조각은 12지신 중 원숭이를 표현한 것이네요. 양 옆에 있는 조각은 모양으로 봐서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문화유산 답사를 하며 이렇듯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알게 될 때, 그 기분은 원하던 것을 얻었을때와 같습니다.
모양이 확실한 12지신 중 원숭이상.. 참 사실적으로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남아 있는 형태로 무엇으 표현한 것인지 좀 알기 힘듭니다.
이 조각 역시 12지신 중의 한 동물을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답사를 떠날 때 '이번에는 어떤 새로움이 나를 반길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그 새로움을 얻든 얻지 못하든 내 눈은 항상 새로움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다니는 곳 어느 곳이라도,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항상 새로움을 얻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으로 세운 삼층 석탑
영암사지의 석탑은 3층입니다.
석탑은 2중 기단으로 통일신라시대 탑의 특징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제일 아래에 있는 하대석은 4개의 석재를 모아 만들었으며, 그 위의 상대석은 양 모서리에 우주(隅柱)를 새기고, 가운데에 탱주(撑柱)를 조각하여 면석을 양분하였습니다. 금당쪽을 바라볼 때 앞면의 오른쪽 우주는 밑 부분이 깨져 있습니다.
석탑을 설명하는 용어들이 참 어렵지요?
모두 한자로 되어 있고, 평소 접하지 못하는 단어라 무슨 말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한자를 이해하고, 탑이 건축물을 본따 세운 것이라는 것만 이해하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위에 설명한 상대석의 우주와 탱주를 보면, 한글만 보면 우주가 우주공간을 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요?
한자를 보면 隅자가 모퉁이를 뜻하고, 撑자는 버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주는 모퉁이 기둥이고, 탱주는 중간 기둥(버티는 기둥)이라는 것이지요...
보통 통일신라 시대에는 탱주를 2-3개 조각했다가, 고려시대로 넘어가면서 그 수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다른 부분의 명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더욱 자세한 설명은 골포와 탁순 카페에 있는 알기 쉬운 석탑의 용어(클릭하세요)를 참조하세요.
3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옥개받침 수가 4개인 것을 봤을 때 8세기 보다는 후대에 조성된 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경주 불국사에 있는 석가탑은 통일신라시대 탑을 만드는 기술이 극에 이르렀던 8세기에 세워졌고 옥개받침 수가 5개 입니다.
영암사지 3층석탑을 내려보고 있는 모산재 바위산을 올려다보니 가히 이곳이 큰 절이 들어설만한 명당자리 같아 보입니다.
절터를 병풍처럼 싸고 있는 모산재 역시 뭔가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석탑앞에서 바라볼 때 왼쪽 봉우리 쯤에는 황포돛배의 돛을 닮았다고 해서 '돛대바위'가 있고, 그 위로는 우리나라 명당자리 중 하나라는 '무지개터'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산재를 올라 왼편으로 내려오다보면 남녀 청춘의 순결을 알아볼 수 있다는 순결바위도 있습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지만...
절터를 병풍처럼 둘러싼 모산재 모습
3층석탑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부처상으로 추정되는......
ㆍ해인사 주변 테마길 ‘합천활로’
해인사에서 알았다. 슬픔없는 죽음도 있는 법이다. 그날(6일) 당대의 대학승 지관스님도 다비의 불길 속에서 그렇게 떠났다. 불교에서는 육신이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가지 기운(四大)으로 이뤄졌다고 가르친다. 이제 본래의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다.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듯이. 스님네들은 끝까지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았다. 회자정리, 생자필멸의 마지막 법문으로 새겨들으면 그만이었다.
그 해인사가 있는 곳, 경남 합천은 소백산맥의 지맥이 이루어낸 첩첩 산줄기가 병풍 친 외진 산골이다. 이곳은 요즘 유행하는 새로운 ‘테마길’을 만들면서 ‘합천활로(陜川活路)’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두 여덟개나 된다. 그 중에서 ‘해인사소리길’ ‘합천호둘레길’ ‘황매산기적길’을 다녀왔다
국내 으뜸 사찰 해인사는 부처님 말씀(법보)을 새긴 팔만대장경이 있어 ‘법보종찰’이라고 한다. 해인사소리길은 고운 최치원의 발자취를 따라 해인사로 드는 길이다. 소리길은 세상의 번잡함을 잠시 잊고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라는 뜻인 것 같다.

저녁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합천호. 영남 내륙지방의 명산들에 둘러쌓인 합천호는 산자락 한 굽이를 돌 때마다 전혀 다른 풍광을 보여준다.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홍류동 계곡은 가야산(1430m)과 해인사 앞산 격인 남산제일봉(1010m), 매화산(954m)에서 쏟아져온 물줄기를 합쳐 줄기차게 흐른다. 최치원이 수도했다는 농산정(籠山亭), 그의 칠언절구가 달필로 새겨진 제시석(題詩石)이 있다. 차량 왕래가 많아지면서 옛날만은 못하지만 산이 깊어서 소나무가 울울창창하고 물이 맑다. 생전 성철스님은 여기서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청량한 법어를 세속으로 흘려보냈다.
해인사에서 새벽을 맞을 때 산사여행은 더 뜻깊다. 하루 만에 다시 찾은 일주문, 봉황문, 해탈문, 대비로전, 대적광전, 그리고 지난해로 딱 천년을 채운 팔만대장경이 들어있는 장경각까지 어둠 속에 고요했다. 또르륵 딱딱! 아스라한 새벽 도량석 목탁소리가 청아했다.
합천호의 겨울은 새벽 물안개가 하이라이트라고 한다. 그런데 우왕좌왕하다가 그 장관을 놓치고 말았다. 이미 해는 중천에 솟았고, 호수의 잔물결에 햇살이 비쳐 은빛 비늘처럼 반짝거렸다. 대병면과 봉산면, 용주면 일대 합천호는 1988년 낙동강 지류인 황강을 막아 합천댐을 세우면서 생긴 인공호수다. 국내에서 5번째로 크다. 그러나 합천의 높은 산들 사이 협곡에 폭 빠져있어 소양호처럼 넓어 보이지는 않았다. 드라이브하기 좋은 길은 호반을 한 바퀴 빙둘러 감돈다. 합천호둘레길이다. 굴곡이 많으니 겨울철에는 운전을 조심할 것.
봄철을 빛냈던 백리벚꽃길은 이제 나뭇잎을 다 떨어뜨리고 적막하다. 훤하니 개활지가 된 언덕에서 황매산((1113m), 악견산(634m), 금성산(609m), 허굴산(682m) 같은 수려한 산들이 호수에 발담근 멋진 풍광을 눈에, 혹은 사진에 담을 수 있다. 호수 한가운데 조롱박을 엎어놓은 것처럼 떠있는 섬은 사진가들에게 ‘뽀너스’다. 백로떼와 물새들도 한가로이 헤엄쳐 다닌다. 사진 찍는 이들은 합천댐 옆에 있는 보조댐 주변에서 산안개와 물안개가 몸을 섞고, 겨울철새가 날아다니는 풍경을 ‘몽환적’이라고 했다.
합천댐 한가운데쯤 되는 용주면 죽죽리 다랑논의 경치는 경남 남해 못지않다. 마을 뒷산 비탈에는 잎새 떨군 채 삐쭉삐쭉 줄지어 선 하얀 자작나무숲이 그냥 한 폭 그림이다. 용주면의 노파망향탑, 봉산면의 망향의 동산 등 호수 주변 곳곳에 수몰된 옛 마을 사람들의 안타까운 실향 흔적이 남아있다. 호반도로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가와 문화재들도 수몰지에서 옮겨온 것들이 많다. 조선시대 학자 율곡 이이를 모시는 옥계서원, 송주(松酒)라는 술로 유명한 송씨고가, 현초 김시용을 기리는 현산정, 남명 조식의 추모비 등이 그렇다.
힘 빠져서 기운을 좀 받고 싶은 이들은 황매산기적길로 간다. 황매산은 전국 최대 규모의 철쭉군락지로 유명하다. 정상에 서면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등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황매산의 한 봉우리인 모산재(767m)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전체 산행 거리는 3.1㎞. 산세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웅장한 바위들이 대단한 기(氣)를 뿜어낸다고 한다. 풍수학자들은 명당으로, 기 전문가들은 엄청난 에너지가 흐르는 곳으로 꼽는다.
모산재 아래 영암사지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쌍사자석등, 삼층석탑, 건물터, 계단 등이 남아있다. 금당터 기단의 사자 조각, 주춧돌의 신장 조각, 석등 기단부의 고양이 조각, 그리고 돌마다 새겨진 연꽃무늬, 구름무늬…. 폐허 속에서도 하나같이 아름답고 귀한 유물들이다.
금당터 앞 쌍사자석등과 서금당터의 돌거북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영암사지는 모산재가 병풍처럼 둘러 더욱 빛난다
영암사 폐사지에 펼쳐진 천년 세월의 적막이 꿈속인 양 아늑했다.
나머지 합천활로
■ 영상테마추억길 = <태극기 휘날리며> <모던보이> <서울 1945> <에덴의 동쪽> <자이언트> <써니> <고지전> <마이웨이> 등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한 ‘합천영상테마파크’. 1920년대 일제 강점기부터 1960~1980년대 서울의 풍경을 150동 규모의 마을로 재현했다. 경성역을 비롯해 일제 강점기 서울 도심을 한 바퀴 도는 추억의 전차도 타볼 수 있다.
■ 정양늪생명길 = 황강 지류 아천천의 배후습지. 경관이 빼어나고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로 생태학적 보전가치가 높다. 천연기념물인 붉은배새매와 황조롱이, 멸종위기종인 말똥가리도 깃들여 산다. 나무데크와 황토흙길로 정비한 생태공원으로 사색하며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 다라국황금이야기길 = 가야의 소국 가운데 하나인 다라국의 흔적. 1985년 옥천고분군에서 용과 봉황무늬가 새겨진 황금칼, 출(出)자형 금관, 말갑옷과 말투구, 원통형 그릇받침, 쇠도끼, 미늘쇠, 고대 로마산 유리잔, 귀고리, 구슬 등이 출토되면서 문헌에만 있던 다라국의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고분 앞쪽에 합천박물관이 있다.
■ 황강은빛백사장길 = 황강은 합천을 가로지른다. 백여리에 이르는 맑은 물과 깨끗한 모래사장이 있다. 바나나보트, 웨이크보드 등 수상 스포츠와 야영을 즐길 수 있다. 황강레포츠공원 맞은편에 고려시대 세워진 함벽루가 강가에 바짝 붙어 높다랗게 서 있다.
■ 남명조식선비길 = 남명은 삼가면 외토리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경상좌도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뤄 ‘좌퇴계 우남명’으로 불린 대선비다. 벼슬에 나가지 않고 뇌룡정(雷龍亭)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지리산을 둘러보고 명저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다. 삼가면은 한우로 유명하다.
● 경북 서북부에 있는 합천은 88올림픽고속도로를 탄다. 해인사교차로를 이용하면 쉽게 해인사에 닿는다. 해인사에서 야로면사무소를 지나 26번 국도를 타고 거창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합천호. 좌측 1034번 지방도로 갈아타면 합천호 호반도로 가운데 가장 조용한 길이 나온다. 모산재는 59번 국도(호반도로)~1089번 지방도~6번 군도.
● 해인사 주변에 백운식당(055-932-7393)과 해인식당(055-933-1117)에서 ‘대장경밥상’을 낸다. 삼가면에 삼가대가식육식당(055-933-8249) 등 한우고깃집이 몰려있다. 모산재식당(055-933-1101)은 직접 만든 손두부, 황매산식당(055-932-3883)은 한정식을 잘한다. 민물회합천호새터식당(055-934-0389)은 민물회 전문점이다.
● 숙박은 합천호 주변의 펜션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여울펜션(055-931-8166), 동화속펜션(055-931-1080), 아름다운무지개펜션(055-931-2343), 솔나루팬션(055-933-0277), 합천레이크뷰펜션(055-931-3306) 등이 있다.
● 오도산(1134m) 정상에서 보는 일출이 멋지다. 사방 10리 안에 마을을 찾기 힘들다는 오지였다.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야생표범이 잡힌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정상까지 도로가 나있다. 오도산 중턱인 해발 700m 지점에 자연휴양림(055-930-3733)이 있다. 휴양림의 통나무집 숙소 앞은 계곡이다. 통나무집은 모두 14동, 방은 19개다
.
● 문의 : 합천군 관광개발사업단. (055)930-3756
<2003.1월 어느 날 김석환>
합천 영암사터.
사람들은 여행을 좋아한다. 그리고 무엇인가 별난 것을 보기를 좋아한다.
그 별난 것이란 것이 결국은 눈에 확 띄는 그 무엇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이름만 좇아 다니는 경향이 있다.
유명한 곳이어야 이것저것의 갖추어진 형태를 볼 수 있고 눈에 들어오는 확인 거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종의 '눈의 허영'이랄까?
그런데 그런 허영심은 금방 바닥이 드러나는 것이라서 즐거움의 깊이보다는 그냥 자기 즐거움의 너스레에 대한 확인 정도로 끝나기가 일수이다.
그것은 무슨 눈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눈이 있으니 그 눈을 만족시켜줘야 할 그 무엇을 보여줘야 한다는 눈에 대한 숙제 같은 것이랄까?
나아가서는 자기의 허탈한 삶에 대한 자족감 내지는 자기 삶의 변명 같은 것이랄까?
하긴 그런 것도 필요할 것이다.
나도 일만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다니는 이런 유명하다는 곳도 다닌다는 자족감.
문화적인 삶의 한 '귀탱이'를 그래도 놓치 않고 가끔은 그 분위기에 젖을 수 있다는
자기 합리화 같은 것이고 그를 통해 일상의 무료함을 일부는 보상받을 수 있는
자기체면 같은 것이기에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 자기체면의 사치가 모이다 보면 우리 사회 전반의 문화 의식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기에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란 생각이다.
문화는 거창한 이론이나 전문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보다는 일반대중의 그런 아주 보잘것없고 스치듯 하는 관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사람들은 유명한 곳만 그저 개미의 길이 그러하듯이 그냥 훑기만 하고 돌아다닌다. 우리나라 절간이 대표적이다.
제철의 유명사찰을 가보라! 절 건물이 산에 박혀 있다기보다는 사람들의 물결이 지고 있는 형상이다. 거기서는 무슨 문화니 역사니 예술이니 하는 것은 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고 그저 '사진한방'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덜 붐비는 때를 찾아서 다니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미 완성된 형태나 크기의 모양에는 영 감응이 없다.
그런 곳에 가면 이미 나의 상상력이나 생각의 깊이가 그 건물처럼 이미 완결이 되어
있어서 도통 별다른 느낌이 없이 돌아오곤 한다.
시간의 때를 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요즈음에 다시 만들어 졌다는 이유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이미 어떤 형태로든지 모양새가 갖추어 졌다는 데서 오는 생각의 단절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고 또 나의 무지에서 오는 것이거나 생각의 깊이의 낮음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런 곳에 가면 그저 멍해 질 뿐이다.
역사적인 문화유산인 영주 부석사에도 그런 곳의 대표적인 곳이다.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에 서서'라는 책제목이 있듯이 그 부석사가 엄청나게 역사적으로, 조형적으로, 지리적으로 그 감흥의 깊이가 큰 절인 모양인데 나는 아무리 더듬고 '이리공 저리공' 머리를 써보고 여기에 서보고 저기에 서보고 해도 도통 잡히는 것이
없다. 아마 앎이 적기에 그럴 것이다.
규모가 엄청난 송광사나 화엄사나 해인사에 가봐도 그렇다.
이렇다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 없이 그저 커다랗다란 생각만을 가지고 돌아오게 된다.
시각적으로는 꽉 찬 모습이었지만 뭔가 마음으로는 허전하다.
그저 그 주변의 느낌이나 만남이나 하는 것들만이 돌아오는 나의 빈 가방을 채워 줄뿐이다.
로마에서도 그랬다는 생각이다.
그 유명하게 휘황찬란한 바티칸 궁전에서는 그저 칠부 반바지를 무릎 아래로 잡아
댕겨서 문지기의 입장불가의 추상같은 눈 기준을 벗어나서 무사히 들어갔었다는
기억과 무슨 장식이 이리 덕지덕지일까라는 기억이 전부이다.
다행이 미켈란젤로 아저씨가 버티고 있어서 조금은 '카버'가 된 정도이다.
하지만 폼페이 유적지에서는 발걸음 하나 하나나 손길 하나하나가 다 감동이었다.
카라칼라 목욕탕의 폐허속에서 잡혀지는 그 엄청난 벽의 두께나 로마노 지역을 거닐 때 들리는 듯한 로마군의 말발굽소리들은 정말이지 이역만리에서 느끼는 감동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도 그렇다.
그런 유명사찰보다는 산 속이나 논밭에 버려진 폐사지가 더 감동적이다.
산속 깊은 곳에 흔적 없는 절터를 지키고 있는 외로운 탑 하나나 부서진 비석의 이수나 거북등을 보노라면 온갖 생각이 겹친다.
논 한가운데에 외롭게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우두커니 서있는 커다란 당간지주를 어루만지노라면 생각의 여행이 끝 가는 데가 없다.
황룡사지 심초석의 거대함과 그 굴곡, 거대한 미륵사터와 풍상을 가까스로 이고 있는 부분만 남은 미륵사탑의 애절함이며 신라인의 의지의 표상으로 하늘을 찔러 받치고
있는 감은사지의 감은사탑 철주의 뾰족한 기상, 어느 절터의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석재들의 아우성 등이 그렇다.
아마는 완결되어 있는 형태보다는, 하나의 폼이 완성되었다가 없어진 흔적만을 간직
하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그 완결을 마음에 그리는 것이 사람이 본능이 아닐까 싶다.
음악도 미완성곡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사람이 밥도 먹다가 수저를 놓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채울 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그 것이 미완이든 부서져서 결국 역으로 미완으로 남았던.
모든 폐사지는 나한테 그런 완성을 꿈꾸게 한다.
그러다 보니 이리저리 모자란 앎을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펴 본다.
이렇게 한적하고 쓸쓸한 곳에서 옛날에는 엄청난 삶의 존재들이 역사를 이루고 살았다는 것이 신기하고 그 들의 기원이 간절하고 또 그 간절함이 예인들의 손을 빌어서 이렇게 돌 조각으로 표현되고 각인되어 부분적으로나마 남아서 나의 예업의 기본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에 젖어들게 하곤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가 목조문화여서 각종 전화로 그 전해오는 것이 적다는 아쉬움을 가졌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나에게는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목조는 타서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돌로 만들어진 부분들이 마치 도통한 중이 죽으면 몸은 살라져 없어지지만 사리는 남아서 그 득도의 깊이를 후세인에게 알려
주듯이 돌로 만들어졌던 부분들이 남아서 과거 선인들의 체취를 느끼게 해주고 덧붙여서 나의 상상력을 마음대로 펼쳐서 과거라는 타임머신을 타게 해주고 또 나의 작업의 하나의 빌미가 되 주니 나로서는 여간 다행이 아니다란 생각이다.
요즈음엔 가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내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사주처럼 돈이 엄청나다면 경주전체를 사서 예전의
경주모습 그대로 복원을 하면 어떨까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돈이 있어 모두를 사들여 부시고 다시 지으려도 제일 문제가 그 당시의 도시설계나
건물의 모양 등을 모르니 천상 내로라 하는 심령술사들을 다 모아서 그 옛날의 경주
시민을 최면으로 불러서 재 건축을 하면 안될까하는 하느님도 불가능한 생각을 해보곤 한다.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이야 잡념이지만 실제로는 있는 문화재나 잘 지키고 복원 가능한 것은 복원을 하고 하면 좋으련만 사람들이 사는 것을 우선으로만 치니 많은
문화재가 훼손되고 복원도 지지부진하고 그런 모양이니 안타깝다.
아무튼 나의 폐사지에 대한 생각은 이렇듯 유별난데 그 중에서도 가보지도 못하고
책에서만, 사진으로만 보고 글로만 접한 합천의 '영암사지'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소개할까 한다. 가본 곳이 아니라 주변 경관은 잘 안 잡히지만 그 흩어져 남아 있는
석재들의 모양들이 예사롭지가 않은 것을 보면 아마 그 옛날엔 꽤 규모가 장대했던
절이었던 가보다.
우선 금당 전면의 석축대가 인상적이다.
꼭 요즈음 학교의 '구령대'같은 모습이다.
수직으로 쌓아 올린 그리 높지 않은 축대 좌우로 오르내리는 돌계단이 있는데 그것이 그냥 돌계단이 아니고 무지개형태로 좁다랗게 한컷 멋을 부려 통으로 깍아 만든 계단이다. 그냥 돌을 계단으로 쌓으면 간단할 것을 이리 통으로 멋을 부려서 깍다니 하잖은 돌계단에 들인 정성이 평평한 생각을 넘는다 하겠다.
그것이 좌우에 대칭으로 있는 것도 특이하다.
본래 우리미술은 대부분 이런 정형화된 대칭을 기피한다.
대칭을 찾더라도 다보탑과 석가탑의 대칭처럼 수치적인 대칭이 아닌 미학적이나
시각적인 대칭을 찾는데 이것은 사뭇 다르다.
계단이란 것이 단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은 세상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란 생각을 선인들은 한 모양이다.
종묘 정전의 계단도 그런 것이란다. 계단 중간에 두 줄의 무지개 아치를 만들어 그 밑에 구름무늬 투각을 만들어서 구름 밑의 이 세상과 구름 위의 저 세상, 즉 죽음의 하늘세계와 이승의 삶의 세계의 경계표시라니 아마 이 무지개 계단도 사람들이 때 묻히며 사는 마을과 청결한 마음이 요구되는 불전의 세계 또는 사바세계와 극락세계을 구분 지우려고 그렇게 정을 들인 것이 아닐까.
발아래 밟히는 돌계단에도 그런 깊은 뜻을 새긴 선인들의 마음이 예술적 깊이를
자아내고 가벼운 신발 밑의 세계를 높은 천상의 세계와 연관시킬려던 지혜가
감동적이다.
그런데 좁은 계단이 좌우로 똑같은 모습으로 있는 것이 의문이다.
꼭 지금의 '구령대'가 상을 탈 때 한 쪽으로 올라와서는 다른 쪽으로 내려가기 위해
두 계단이 필요한 것처럼 그런 모습인데 그 때 사람들이 지금의 구령대를 본 받았을 리도 없고 통 알 수 없는 대칭의 모습이다.
한 쪽은 산사람들이 사용하는 계단이고 다른 쪽은 죽은 사람들의 계단인가?
한쪽은 중들의 계단이고 한 쪽은 일반인의 계단?
그냥 계단 하나만 만들면 쉽고 간단할텐데 두 개로 만든 것은 무슨 이유가 있을 텐데 알 수가 없다.
이어서 쌍사자 석등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쌍사자 석등이 단 세 개만이 남아 있다니 이 절이 예사로운 절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것으로도 확인이 된다 하겠다.
사자의 모습이 애처롭다 해야 할까? 귀엽다고 해야 할까? 구별이 안 선다.
우리들도 일을 하다보면 손만으로는 힘 들 적에는 머리도 더해서 짐을 받드는데 이 두 사자도 앞발로만은 부치는지 머리까지 석등 밑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동물의 왕답지 않은 모습이어서 애처롭다. 산천대지를 포효하며 거닐어야 될 백수의 제왕이 기껏
석등이나 낑낑거리고 이고 있다니 그 체면이 말이 아니다 싶다.
옛날 사람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동물을 사람들의 사회에 많이 끌여 들였나 모르겠다.
신화나 옛날의 작품 등에 수시로 등장하는 것이 미물에 불과한 동물들이다.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들이 왜 이리 하찮은 짐승들을 신격화시키면서까지
인간의 세계에 끌여 들였는지 잘 모르겠다.
아주 오래 전에는 인간보다 동물이 더 힘이 세고 무서운 존재였기에 그랬을까?
인간도 결국은 그런 동물의 선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일까?
온갖 종류의 짐승들을 다 신성시한 것을 보면 옛날 사람들의 생각 속엔 무언가 지금과 다른 짐승들에 대한 경외심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취미나 몸보신이나 돈이나 위험의 핑계로나 하도 남획을 많이 하고 인간들의 의한 환경의 오염으로 멸종을 했거나 멸종위기의 짐승이 많으니 그런 선조들의 경외심에 비추어
보면 우리야말로 짐승만도 못한 '개망나니'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이것말고도 사자상이 여러 개가 더 있는 것을 보면 이 절이 무슨 사자하고 관계가 있는 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금당지 기단 전면, 동, 서 여기저기에 사자 부조상들이 있는데 그 모습들이 아주 신묘하다.
봄날 햇볕에 졸린 듯이 또는 시원한 바람에 사념에 잠긴 듯이 턱을 괴고 있는 물끄럼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자의 모습, 무슨 미련이 많은지 뒤를 돌아보고 있는 사자의 모습, 어딘가를 가야할텐데 하면서 못 움직이는 자신을 한탄하는 듯한 모습이며 심지어는
자기가 무슨 해탈이라도 한 듯이 웃음을 머금고 있는 사자의 부조상도 있다.
사자의 웃음이라니 그 착상도 기발하고 그런 상이 여기말고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자세히 보면 벌룸거리는 콧구멍과 벌린 입사이의 송곳니 때문에 웃는 모습이라기보다는 더 복잡 미묘한 모습이지만 눈은 분명 웃는 모습이다.
그 사자들이 다 금당 기단을 받치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들이니 생전은 너무 부족하여 돌로 새겨져서라도 거기를 안 떠나고 지키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표현같이 보인다.
하지만 지킬 대상인 금당은 다 불이던지 풍상에 날라가 버리고 사자들만이 지킬 것 없이 빈 세월을 지고 있다.
이어서 법당으로 오르는 계단의 '가릉빈가상.
'에밀레종'의 비천상 같은 것이 아주 낮은 다섯 단의 계단 좌우에 투각으로 조성되어 있다. 부분적으로 깨졌지만 그 모습이 특이하고 다른 곳에서는 발견이 안 되는
형상인데 아마는 법당의 세계가 천상의 세계처럼 고고한 세계인 것을 나타내려고
한 모양이다. 하늘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들락이라는 표시인지.
비스듬한 모습이 계단의 기울어짐에 조화를 둔 것 같아 세심함이 돋보인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이런 부속물들의 예사롭지 않음에 비하면 3층석탑의 모습은 너무나 평범하다는 생각이다. 보통은 절에서 탑 조성을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법인데
다른 것들의 세세한 신경씀에 비하면 너무나 평범하다.
그래도 우리의 실망을 반감해 줄려고 도저히 알 수 없는 설치물이 있으니 마음대로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라고 배려한 것이 아닐까?
그것은 법당터 가운데의 네모 반듯한 구획에 돌로 윤곽을 두른 시설물이다.
재도 나옴으로 혹시는 무엇을 태우는 곳이 아닐까 한다 지만 법당 안이고 보면 그 상상도 만만치가 않아서 전문가들도 궁금하기만 하다니 우리도 가서 마음껏의 상상력을
발휘해봄 직하리라. 그리고 남아 있는 귀부.
이고 있어야 할 비석은 온데 간데 없고 거북이 혼자 눈을 부릅뜨고 여의주 문 입을
장엄하게 반쯤 벌리고 있는데 그도 우리의 상상력에 일조한다.
대개 비석부분은 그 절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는 법인데 그것이 없으니 이래저래
우리의 상상력을 허공의 빈 비석에 채워 넣어야 한다.
모든 폐사지처럼 그곳도 정작 가보면 허망하리라!
단지 시간의 흐름을 돌 몇 조각으로 지고 있는 모습이 그렇고 화려하던 옛 모습의 흔적치고는 너무나 보잘것없음이 그렇고 바람만이 그 정적에 더하여 들른 이의 마음을 더 수선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의 날개는 끝이 없고 그 작은 것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너무도 가슴깊이 파고드는 것이기에 나는 언제나 그런 곳에 다녀오면 역설적으로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
이번 강추위가 좀 누그러지면 맘 맞는 친구 불러 같이 갔다 올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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