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 靜 ...우두커니, 멀거니/낯설게 하기

2011 유물유적

레이지 데이지 2011. 9. 21. 15:13

 

 

1._한국역사문화_특징을_설명하시오..hwp

1. 한국역사 문화의 특징을 간략히 설명하시오.

 

반만년 유구하게 이어온 우리 역사 문화는 1. 토착적 정서, 2. 공존과 조화 추구, 3. 실천 중시의 특징을 가진다.

 

1.토착적 정서에 대한 특징을 가진 한국 역사 문화를 이해하려면 우리의 건국 신화와 민족사의 출발을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은 신과 인간의 결합으로 탄생했다. 즉, 환웅으로 상징되는 이주 집단, 곰으로 대변되는 토착집단을 정복하여 동화시키고 결국 인간보다는 신의 힘이 강하여 왕권이 강한 국가를 이룬다. 고조선은 한국 최초의 국가로서 민족사의 출발점이다. 우리 민족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단군을 통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확인해왔다.

단군신화로 시작된 각 나라의 건국신화는 상당히 신이한 이야기이지만 현실에 근거하여 자연의 모습을 담아 사람이 쓴 이야기이다.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에는 고조선의 단군신화, 고구려의 주몽신화, 백제의 온조 와 비류 설화, 가야의 김수로 신화, 신라의 박혁거세 -알 영 신화, 석탈해 설화, 김알지 신화 등이 있다. 이런 신화관계분석을 통해 인간과 인간 관계이야기를 엿볼 수 있는데, 신의 힘을 빌린 천신 과 인간의 힘이 강한 지신족의 설화로 구분이 된다. 왕권이 강했던 고조선과 백제는 천신족 신화를 갖고 있고, 귀족의 힘이 강했던 고구려와 신라는 지신족의 신화를 갖고 있다. 특히 지신족의 가장 강한 신라에서는 토착정서 또한 강하게 드러난다.

 

2.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토착적 정서를 중요하게 여겨 산신제와 강신 제를 올렸는데, 산과 강이 자리 잡은 곳이 서로 달라 산신제와 강신제의 모습이 다르며 무당굿도 서로 모습을 달리한다. 토착신앙,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가 공존하고 있다. 다양한 사상이 격돌하던 우리 역사 속에서,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가 하나로 모아지기 시작한 것은 불교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지금 남아있는 유물 유적들을 살펴보면 공존과 조화를 추구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토착적 정서가 강한 신라는 불교를 공인하면서 사회 모습에 변화가 일어난다.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된 이후, 토착 과 불교의 대립과 갈등 양상에서 귀족사회의 공존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으로 변화한다. 불교와 유교의 대립과 갈등은 왕실이 공존과 조화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3. 토착적 중심 사상과 불교의 교리 중에서 현실을 강조하고 중시하는 이론이 서로 만나 색(형식), 공(마음)의 합일점을 찾았고, 사상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며 실천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따라서 우리 역사 문화는 토착적 정서 속에서 자연과의 조화와 친화를 중요하게 여겨 조화와 공존을 이루는 많은 유물유적을 남겼으며, 토착과 불교, 유교 등 종교철학의 조화로 사상적 대립과 갈등을 극복해 왔다. 우리의 다양한 유물 속에 투영된 한국 문화는 우리의 심성을 담아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해온 한국인들이 창조해낸 것이다.

 

 

 

2. 석탑에서 나타난 역사성을 설명하시오.

 

 

석탑은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보관하기 위하여 만든 구조물로서 샨스 크리트어로 스투파라고하며, 부처가 사시는 집, 혹은 불국토처럼 하였지만 원래는 부처의 사리를 넣기 위해서 돌이나 흙 등을 높게 쌓아올린 무덤을 말한다. 반구형의 탑파는 인도에서 불교 이전부터 존재했던 무덤 양식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탑파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부처의 사리를 안치하는 성스러운 구조물로서 불교의 전파와 함께 각 지역에 세워졌는데 나라와 시대에 따라 그 의미와 양식이 다르다. 우리나라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4세기 후반쯤 조성되기 시작하여 중국이나 인도와 다른 독특한 탑이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목탑으로 구성되었으나 점차로 목탑처럼 잘게 나누어 석탑으로 조성되어 점차로 능수능란한 고수의 경지에서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통 돌을 균형 있게 쌓는 탑으로 자리를 잡았다.

 

고구려 - 산간의 고구려는 지형, 지세적인조건으로 단순성, 웅장함으로 석축기술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고분 안에 있는 돌방에 벽화로 인하여 그 시대의 사회문화를 상상력과 추리력으로 미루어 추정할 수 있게 하였으나 현재의 정치적 상황으로 남북의 교류가 안 돼 유물유적확인 탐사 진행이 어렵게 되어 있어, 과거의 기록이나 제3국을 통한 정보에 의존하고 있다. 게다가 탑은 다층석탑으로 건축 되었다고 하고 초기목탑은 현재에는 남아 있지 않다.

 

 

백제 - 평야지대의 벌판에 자리 잡은 백제는 사방이 훤히 열려있어서 사고의 자유로움으로 다양한 수용능력을 보여주어 우아하고 세련된 멋을 보여 주었다. 초기 위례한성 백제는 한강을 낀 너른 벌판이나, 후기 웅진-공주, 사비-부여 역시 평야지대이므로 봉분의 모습도 커다란 둥근 모습으로 변화되어 자체적으로 들판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포용력을 보여준다. 또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으며, 불교를 쉽게 받아들인 이후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다. 많은 사찰이 건축된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지 않고 목탑처럼 돌을 잘게 나누어 맞춤으로 석탑을 만든 석탑의 역사를 보여준다. 익산의 미륵사지를 비롯한 절터와 석탑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부여의 정림사지5층 석탑, 익산의 미륵사지석탑 등이 유명하다.

 

 

신라 - 처음에는 좁고 한정된 경주 분지에 자리 잡아 수구성과 보수성이 강했으나 삼국통합이후 지리적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토착성이 강하면서, 한반도의 2/3를 장악함으로써 많은 경제력을 갖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해외문화 이슬람 문화를 흡수할 정도로 다양성과 화려함을 자신감 있게 표현했다. 실상사의 백장암 3층 석탑은 난간석만 남아 있으나 모든 조각형상이 다 들어 있을 만큼 화려하고 기술이 극에 달한다. 많은 사찰을 건립했다고 하지만 통일이전의 절터인 분황사 터만 남아 있으며 분황사 석탑은 모전석탑 형태이다. 의성5층 석탑은 층층이 돌을 쌓은 모습이다. 화엄사사자탑은 당시 신라의 대표적인 석탑들 중 하나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커다란 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조각기술이 발달되어 경제력을 더하여 자신감을 형성하여 감은사지 3층 석탑, 경덕왕 때 국가적 사업으로 이루어진 불국사가 있으며 통 돌을 쌓아 형성한 석가탑은 토착적인 원칙성을, 다양한 형태 그 자체가 불국토임을 표현하는 다보탑은 공존과 조화를 석탑의 상징성은 물론하고 포용력의 극치로 신라 문화의 절정을 표현했다. 마치 지하수가 흐르듯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사회사상의 흐름으로 불교와 유교의 공존과 조화로운 소통이 역사 유물유적을 이해하는 방법에서 놓쳐서는 안 된다. 또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문화는 그때 그 시간 그 시절 제작인의 의도를 상상과 추리로 추정하여 반듯이 근거가 가능한 문서에 남아 있는 문자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또한, 우리 한국의 역사문화역시 세계화, 국제화에서 벗어 날수 없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여 토착적인 원칙 옛것과 서구화하는 새로운 문화와 공존하는 조화로움을 꾀하여 문화의 다양성을 끌어내는 역사의식을 갖고 유물유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 것이 곧 민족의 우월성을 표현하고 나타내고 진보하는 길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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