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무엇을 하였다 #18_관훈동을 걷다.>
12월 27일 이야기
500인 선물전 사진관람 마치고 관인갤러리 쪽으로 걸어 보았다.
그다지 춥지않고 시간에 밀리지 않고 유유자적으로 건물들 뒷쪽으로 걸었다. 길바닥도 유럽처럼 돌을 쪼개어 박은듯한
고풍스런 길이 나온다. 반질대는것이 마치 비라도 맞은 양하는데 사람들의 구둣발에 닳아서 그런가 싶다. 고전적인 길을 걸으면 몰입되어지는 느낌이다. 유리알유희같은 투명한 생각이 든다.
서울 종로구 관훈동 Hotel the Sun Bee 뒤편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생가터가 있다. 이 자리에 나이가 400년 이상 된 회화나무가 한 그루 있다. 나무는 그 세월에 있었던일을 그저 몸으로 이겨냈는지 많이 기울어져있다. 그 옛날 율곡선생이 서울 생활 할 적에 이 나무밑에서 여름더위 피서했을듯 싶지만 지금은 월급장이 회사원들의 흡연장소이고 겨울에는 팔자에 없는 크리스마스 트리일듯 싶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일대를 독녀혈이라고 했다고. 즉 과부가 많이 나오는 자리를 말한다. 일명 과부촌이라 하는데 풍수상으로 아주 흉한 자리이므로 이곳에 크게 자라는 회화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나무의 양기가 음혈을 막았다는 묘한 이야기를 설명한다.
회화나무는 옛날 선비들이 좋아하여 서원, 서당, 사대부 집에서 많이 심었기에 학자수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곳곳의 옛집이나 서원에서 노거수 회화나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일을 가져오는 나무로, 중국에서는 출세의 나무로, 서양에서는 학자의 나무로 알려져 있다. 오래된 회화나무는 향교, 서원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예로부터 이 나무를 집 안에 심으면 집안에 학자가 나오고 부자가 된다고 해서 양반 집에 많이 심었다. 또한 우리 조상들은 잡신을 쫓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의 역할을 하도록 회화나무를 마을 어귀에 정자나무로 많이 심었다. 회화나무는 뿌리부터 껍질, 꽃 등 하나도 버릴 것 없이 약재로 사용되며, 목재는 가구를 만들거나 건축용으로 사용된다. (웹문서)
길상목으로 꼽히던 회화나무를 심으면 집안에 학자가 나고 큰 인물이 나온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집안이 행복해 진다하여 학자수, 행복수, 출세수라고 불리기도 했을 정도로 귀히 여겼던 나무라고 한다.
꽃이 귀한 여름에 꽃이 피므로 여름 꽃나무로 배롱나무와 같이 가치가 높고 옛 전통대로 고가나 사찰, 서원, 사당 등의 조경수로 제격이다.
그래서인지 창덕궁 돈화문을 들어서자마자 관람로 양 옆에 나란히 늙어가고 있는 회화나무 노거수들...나이 많고 거대한...이들을 심은 연유는 궁궐의 외조(外朝, 임금이 국정을 듣는 곳)는 임금이 삼정승과 벼슬아치들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 가운데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자리에는 회화나무를 심어 특석임을 나타내는 표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창덕궁의 돈화문 안에 있는 세 그루의 회화나무는 바로 외조에 해당하는 곳이다.
위와 같은 까닭으로 궁궐 앞에 심은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회화나무는 이렇게 꼭 외조의 장소만이 아니라 궁궐 안에 흔히 심었고, 고위 관직의 품위를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만년을 보내는 고향 땅에도 회화나무를 심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선비가 사는 곳’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래서 모 어쨌다구 하믄 할말이 없다.
500인전시관람중에 나무 선생님을 만났다. 전에 지리선생님이었다. 정년퇴임 하시고 궁궐과 도성 길라잡이쪽에서 활동 하셨다고 들었다. 그 분과 같이 사진을 보면서 나무와 숲과 자연을 얘기 듣다보니 나에게도 신령수가 한그루 있었야겠다는 쌩뚱맞은 생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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